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해외에서 아마존 주문하기, 15페소 타코, 전망대
2025_6/21
어제의 포쉬 파티 후유증으로 오늘은 10시가 넘어 일어나 샤워를 하고 얼른 라면을 끓였다. 술 마신 다음 날엔 역시 라면이지! 닛신 파란 라면은 조금 느끼하지만 그래도 매운맛이라 다른 라면들 보다는 괜찮았다. 아침을 먹다 만난 I는 내일 떠나는 거냐며 벌써부터 슬퍼했다.
오늘은 스페인어 수업도 없고 내일 떠날 준비만 잘하면 되는 날. 마침 오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기 딱 좋았다. 옥상에서 좀 놀고 짐도 대강 싸고 거실에서 어제 못한 스페인어 복습을 했다. 역시 공부는 바로 복습하는 게 제일 낫지만 이러나저러나 안 하는 거 보단 낫다.
그렇게 복습을 다 해갈 때쯤 리셉션 가족 중 소년이 와서 택배가 왔다고 말해줬다. 드디어 카메라가 왔다! 나가보니 우버 이츠 가방을 가진 배달 직원이 와있었다. 보니까 우리나라처럼 주문한 사이트(아마존)에서 배달을 하는 게 아니라 여러 배달일을 겸하는 듯했다. 나의 이메일로 온 확인 코드를 줘야지 배달 완료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찾느라 허둥댔다. 생각보다 안전하게 배송되는구나.
고프로가 여행까지 버텨주지 못하고 죽어버린 건 너무 슬프고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다행히 내가 오래 머무르고, 예정하고 또 아마존 배달이 가능한 지역에서 고장이 났고, 심지어 할인하는 액션캠을 토요일까지 도착 보장 가능한 상황은 정말 다행이었다.
오즈모 액션 4는 오즈모 포켓 3랑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평가 절하되는 카메라인데 그 덕에(?) 나는 한국에서 지금 판매되는 것보다도 15만 원 정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카메라 없이도 여행할 수 있지만, 그게 나에겐 어렵다 무언가를 대단한 걸 찍는 것도 아닌데 뭔가 기록에 대한 강박 같은 게 있는 거 같기도 하다.
내가 혼자 뚝딱뚝딱 바빠 보이니 I가 서성이다 말고 날이 추우니 차 마시면서 하라고 차를 타다 줬다. 내가 내일 떠나서 슬픈가 보다. I가 타다준 차를 마시며 카메라를 작동해 보고 고장 난 고프로는 혹시 몰라 가방 구석에 챙겨두고,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까 비가 어느 정도 그쳤다. 3시가 다 돼가는데 어쩐지 출출했다. 원래 술 먹은 다음 날엔 배가 좀 고프다.
마침 잘 됐다 싶어 나갈 준비를 했다. El charrito 라는 타코집이 궁금했는데 타코를 식사로 먹고 싶지는 않아서 언제 먹나 싶던 참이었다. El charrito 가는 길이 우리 숙소 옥상에서 보이는 성당 가는 쪽이었다. 타코를 먹고 한번 올라가 봐야지. 여기는 타코가 저렴하고 맛있기로 유명하다더니 3시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타코 하나에 15페소 혹은 20페소, 추천해 달라고 한 거랑 OYO랑 해서 두 개를 시켰다.
안에 속도 적절히 넣고 (많지는 않지만 천 원이다. 많은 걸 바랄 것 없다), 양파 고수를 올려주었다. 한입 먹고는 '어라 왜 맛있지?' 싶었다. 멕시코 시티에서 타코 두 번인가 세 번 먹고 이제 타코 지겨워.. 이랬었는데 그 뒤로 타코 디톡스를 해서 그런가 엄청 맛있게 느껴졌다. 어제 라스 로라스에서 칠라킬레를 먹었을 때도 그랬는데 어쩌면 25일의 여정에 알게 모르게 멕시코에 스며든 건가 싶기도 하고..
여하튼 배부르지 않게, 딱 출출한 정도를 요기할 정도로 잘 먹고 나와서 성당 쪽으로 가봤다. 맨날 숙소 옥상에서 성당 쪽을 보면서 왜 계단 사이사이 바리케이드를 쳐놨나, 못 올라가는 곳인가 싶었는데 경사가 높아서 만들어둔 울타리였다. 울타리끼리의 단차가 커서 양쪽으로 계단이 나있다. 반절만 올라가도 훤히 보이는 산크스리토발.
이번 여행에서 아마 여기가 같은 숙소에 머무는 게 가장 길 텐데 그런데도 나는 신크리스토발의 아주 일부만 보고 가는 것 같아서 슬프다. 열심히 계단을 올랐더니 끝에 다다랐다. 여기도 차를 가지고 올 수 있구나, 성당은 문이 닫혀있었다. 멀리 보이는 집들을 보다가 갑자기 우리 숙소 발견!
열심히 찾으려 애쓰지 않았는데도 어딘가 틈새로 익숙한 건물 색이 딱 보였다. 아마도 애정이 있기 때문에 바로 보인 것이겠지. 항상 저기서 여기를 바라보며 궁금해했는데 이제 여기서 저기를 바라보며 답을 준다. 산크리스토발에서 지낸 지 9일 차, 이곳에서 나는 좀 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는데 더 올 것 같아서 우선은 집으로 돌아왔다. 신크리스토발의 마지막 날이니 카페라도 갈까 하고 찾아보는 중에 한국에서부터 맛있다는 글을 봤던 카페를 가려다 내가 여기서 경험한 걸 믿기 했다. 소피아의 추천 카페를 하나 더 가보기로 한 것이다.
소피아가 casa honora는 비싸지만 맛이 정말 괜찮다고 해서 가격을 찾아보니 커피 한잔에 50페소였다. 이 정도는 투자할 수 있다. 치아파스 커피가 맛있다는 걸 경험해 봤으니까! 카페가 소품샵이랑 같이 하는 듯했는데 요즘의 감성 카페 느낌이 났다. 테이블 간격도 널찍하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테라스에 앉았을 텐데 그것만 좀 아쉬웠다.
메뉴판 가져다주면서 와이파이 연결할 수 있는 큐알까지 같이 가져다주는 센스도 좋았다. 음식 메뉴들도 있어서 커피만 주문해도 되냐 물어보니 "그럼! 우린 라테가 정말 맛있는데!" 했지만 난 아메리카노를 부탁했다.
소피아의 말처럼 향은 honora가 훨씬 좋았다. 커피에 작은 과자까지 올려주는 것도 그렇고 와이파이가 있는 것도 그렇고 15페소 차이로 서비스가 좀 더 좋아진다. 커피 맛도 좋았는데 약간 산미가 있는 원두였다. 가끔은 산미가 있는 것도 좋아서 괜찮았고 같이 준 쿠키가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산트리스토발에 다시 온다면 역시 오노라보다는 엘 토스타다에 더 많이 갈 거 같다. 왜냐하면 서울에서도 굳이 감성카페 안 찾아가고 만만하고 편한 느낌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맛도 나쁘지 않다는 전제가 있으니.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비가 갑자기 엄청 왔다. 그래도 셋째 날부터 한 3-4일은 오후에만 잠깐 비가 왔던 거 같은데 떠날 때가 다가오니 다시 폭우 수준의 비가 오래 온다.
비가 좀 멎었을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6시가 넘어간다. 잠깐 나온 터라 남방도 안 입어 추워지길래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늘도 울퉁불퉁한 길 따라 작은 냇물이 생겨있다. 시원하게도 오는 비, 수잔은 플로리다가 너무 더워서 여름마다 산크리스토발로 5년째 오고 있다는데 이 시원한 비와 가끔은 쌀쌀한 공기가 좋단다. 나도 첫날 비에 홀딱 젖었을 때는 정말 금방 떠나야 하나 싫었는데 이제는 춥지만 이날을 그리워하게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산트리스토발이 좋아진대도 하나 타협이 안 되는 건 이런 날씨 탓에 빨래가 오히려 더 축축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리셉션의 미까에게 드라이기를 빌려서 열심히 말렸다. 오히려 널었을 때보다 많이 젖어있어서 말리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린 거 같다. 내일 짐을 싸려면 빨래가 말라야 하고 여기 1층에 넣어놓으면 더 축축해지는 사태가 발생해 어쩔 수 없었다.
빨래 말리다 보니 8시, 저녁은 아침에 쌀을 불려놨기 때문에 밥을 지어먹어야 한다. 쌀을 가지고 갈까 하다가 얼마 안 남아서 그냥 털고 가자 싶어서 한 건데 불리고 보니 양이 엄청 많았다. 이걸 다 먹고 갈 수 있을까?
그건 내일 고민해 보기로 하고 계란 한알이랑 소시지, 감자를 구워 먹었다. 감자를 처음 사 온 날이랑 똑같이 했는데 이번엔 한번 볶고 건져놨다가 또 한 번 볶아서 잘 익어서 그런지 훨씬 맛있었다. 볶음밥을 하려고 소시지를 썰었다가 밥이 너무 잘 돼서 그냥 볶아먹었다는 이야기.
비는 오늘 밤도 세차게 내린다. 흰 수염 아저씨는 오늘도 오고 가며 짧은 스페인어 대화를 시도하고 I는 볼 때마다 진짜 내일 가냐며 절규하는 척하며 지나간다. 이들과 따로 시간을 내어가며 대화를 하거나 밖에 놀러 다니며 보낸 적은 없지만 오며 가며 10일 동안 짧은 스몰토크들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든 거 같다.
밥을 먹고는 오늘은 일찍 침대로 갔다. 자려고는 아니고 날이 추워서였다. 갈 때가 되니 추워지니 오히려 비 오는 날씨들은 고마웠던 것처럼 느껴진다. 11시가 되니 조심조심 귀가하는 발걸음 소리만 잠깐 들려고, 그것 말고는 빗소리만 들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