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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Day26. 무덤이 된 산크리스토발 떠나서

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산크리스토발에서 플라야 델 카르멘 야간버스, 20

by SUNPEACE

2025_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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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산크리스토발을 떠나는 날. 날씨 체크하러 옥상에 올라가니 흰 수염아저씨(그저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알베르토였다. 알베르토는 자기 이름이 아무 의미가 없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래 살다 보니 익숙해져서 뭐 나름 좋아졌다고. 내 이름에 의미가 있는 것도 부럽고 한국인들 대부분 의미를 가지고 있다니 흥미롭다고 했다)가 있었다.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건지 내가 없으면 이 동네를 노래 부르며 돌아다니는 네가 생각이 날 거 같다 (딱 한번 그랬는데 그걸 이 아저씨가 봄ㅎㅎ;)며 인사를 했다.


샤워를 하고 동네 슈퍼로, 소시지가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없어서 햄쪼가리랑 버스에서 먹을 과자를 샀다. 이제 이 슈퍼도 안녕이로구나. 요리를 하기 전에 짐을 먼저 다 정리하고 리셉션에다 침대는 다 치웠는데 키 반납만 나갈 때 해도 되냐니 흔쾌히 그러라고 해서 짐을 러기지룸으로 옮길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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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 사온거랑 계란 두 개로 볶음밥을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밥이 생각보다 더더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밥 반 정도는 덜어두고 반을 볶았다. 근데 어쩐지 맛이 없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햄 자체가 간이 안된 햄이었어서 그런 거 같다, 카레가루도 넣어봤지만 소생이 안 돼서 일단은 그냥 담아두었다.


요리를 하고 있다 보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날 비가 오면 귀찮아지는데.. 생각해 보면 메스티아에서 떠날 때도 비가 왔는데, 좋아하는 곳을 떠날 땐 얼른 가라고 비가 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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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겸 점심으론 밥이 반이 남았는데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 결국 짐도 줄일 겸 라면을 끓였다. 라면도 오늘따라 맛이 없는 걸 보니 내가 입맛이 그렇게 있지 않은 가보다. 떠나는 마당에 맛이 무슨 소용이야. 비 줄기는 그래도 약해졌다. 오늘따라 호스텔 커피도 떨어져 있다. 비가 오지만 기꺼이 우산을 들고 El tostada로 향했다.


오늘은 미디엄 사이즈로 텀블러에 담아달라고 부탁했다. 커피를 사들고 돌아오니 한시 반, 진짜 떠날 준비를 할 시간이다. 옥상에 올라가서 마을을 한번 둘러보고, L 할아버지랑 I가 같이 있길래 가서 인사를 했다.


I는 인스타그램을 달라고 자기를 오빠로 생각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란다. L 할아버지는 너의 여행엔 행복이 있을 것이라며 좋은 말을 해주었다. 둘에게 인사를 하고 내려와 양치를 하려고 방에 들어가니 벌써 내 6번 침대에 손님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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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아주머니셨는데 짧게 대화를 하며 나는 이제 떠난다고 이 침대가 여기서 제일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분도 여기서 스페인어를 배우며 꽤 오래 계실듯했다. 가방을 메고 나가면서 "여기 난 좋았는데 너에게도 마음에 들면 좋겠다. 내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했더니 "벌써 느껴지고 이곳에서 행복한 순간이 있으면 나에게 마음을 보내겠다"라고 해줬다.


가방을 앞뒤로 뒤뚱 메고는 수잔의 방 쪽으로 가봤다. 다행히도 수진이 밖에 나와있어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수장은 가방을 앞 뒤로 뚱뚱히 맨 나를 안아주며 몸 잘 챙기라고 해주었다. 그리고 주방에 있던 늘 행복하게 순간을 즐기는 아저씨도 스페인어로 잘 가라고 해주고 거실에서는 스태프 미까를 만났다.


미까가 너무 슬퍼해서 언젠가는 돌아온다고 얘기를 하고 고마웠다고 하며 인사를 나눴다. 리셉션의 친구에게도 마찬가지. 문을 닫고 길을 떠나는 게 참 그렇다. 내가 끝이 어느 정도 있는 여행을 좋아하는 건 이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지금보다도 더 힘든 이별의 시간을 맞이해야 했을 테니까.


사하라의 알리네를 떠날 때 메스티아의 무슈쿠디아니 매너를 떠날 때나 무이네를 떠날 때 샤오라우치우의 작은 집을 떠날 때 이렇게 슬펐었다.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인데, 다시 올 수 있을까? 어느 날에는 내가 다시 가고 싶은 곳들만 도는 여행을 한번 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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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가방이 엄청 무거워졌다. 10일 만에 가방을 메서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햇반 4개, 라면 4개, 간장, 샴푸, 액션캠 상자 등 그런 짐이 늘었다, 샴푸는 첫날 사놓고 호스텔에 있는 거 그냥 쓰느라 한 번도 안 썼다. 체감으로는 한 15킬로 되는 거 같았다.


ADO까지 힘들게 걸어서 도착. 역시나 버스 시간은 출발 시간이 아니라 탑승 시간인가 보다 2시 40분 버스인데 2시 40분부터 탑승을 시작했다. 장장 20시간의 여정이다. 원래 어딘가를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막상 가방을 메면 어서 도착하기를 바라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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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을 하는데 이미 꽤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역시 내 옆자리도 사람이 있다. 어디에선가 와서 산크리스토발에 들린 거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톡스틀라 쪽으로 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톡스틀라를 한 바퀴 돌아 위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거였다. 톡스틀라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탔다.


톡스틀라를 지나고 한번 검문이 있었다. 자동출입국시 받는 영수증 같은 애를 항상 같이 끼워 다녀 큰 문제는 없었다. 특이 사항이라면 나에게만 언제까지 멕시코에 있는지 물어봤는데 다행히 영어로 물어봐줘서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IMG_3217.JPG 라임물 30페소

그리고는 치아피스 주와 타바스코 주를 넘기 전 휴게소에 잠깐 서서 15분 간 쉰다. 물을 사려고 나갔는데 물이 안 보여 물어보니 이게 물이란다. 물에 라임이랑 소금(?)과 설탕 같은 걸 넣은 자체 제작한 이온음료 같았다.


밤이 찾아오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길을 달리고 잠에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내린다. 옆자리 아저씨가 나도 내려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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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에라모사라는 도시였는데 여기서 25분 뒤에 출발할 거니 다 내리라고 한다. 버스 탑승 플랫폼을 비워줘야 해서 차고지 쪽에 들어가야 한다고 다 내려야 하는 것 같았다. 여기는 ADO 전용 대기 공간 앞에는 경호원을 두 명이나 두고 있었다. 치안이 좋은 도시는 아닌 건가?


전광판엔 이미 탑승하라고 나오지만 내가 다시 타야 할 버스는 아직 플랫폼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같이 내렸고 다시 탈 거 같은 사람 한 명을 콕 집어서 그 사람을 유의해서 본다. 그럼 내가 언제 다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내 옆자리 아저씨는 무채색 옷을 입어서 눈에 띄지 않아 빨간 후드를 입은 아저씨를 집어 중간중간 보고 있었다.


근데 그 아저씨도 그걸 눈치챘는지 우리가 타야 될 때가 되니까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쳐다봤는데 눈치를 채고도 기분 나빠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챙겨주셨다. 감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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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사히 다시 버스를 탑승하고 밥을 먹었다. 그때가 아홉 시쯤, 낮에 해둔 볶음밥을 먹기가 좀 눈치 보여서 (아무래도 많은 친구들이 샌드위치나 빵 같은 간단한 걸 먹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쉬는 동안 피자 한판을 들고 탄 친구들 햄버거를 사 온 친구들 등 모두 먹을 걸 들고 타서 먹는 걸 보니 먹어도 되겠다 싶어서 나도 꺼내서 먹었다.


밤이 되니 역시나 버스는 많이 추워져서 바람막이를 입고 남방을 덮고 잠을 잤다. 새벽에 한 군데서 사람들이 좀 내리고 또 한참을 가다가 아침 5시 반, 메리다에 도착하니 80프로의 사람들이 내렸다. 내 옆자리 아저씨도 드디어 내렸다.



해가 뜨는 걸 보며 조금 가다 보니, 이쪽 동선에는 휴게소 개념이 없는 건지(멕시코 시티에서 와하까에 갈 땐 휴게소 같은 곳에서 쉬었다) 메리다 외곽 쪽 식당에 세워 아침 먹을 사람들은 먹으라며 25분을 쉰다고 했다.


입맛은 없고 몸이 찌뿌둥해서 내려서 스트레칭을 좀 했다. 동부에 오니 공기가 후덥지근해지고 나무 모양이 바뀌었다. 많이 오긴 왔나 보다. 그래도 아직 4시간은 더 남은 여정, 그래도 자리가 여유로우니 갈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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