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산크리스토발에서 플라야 델 카르멘 야간버스, 20
2025_6/22
오늘은 산크리스토발을 떠나는 날. 날씨 체크하러 옥상에 올라가니 흰 수염아저씨(그저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알베르토였다. 알베르토는 자기 이름이 아무 의미가 없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래 살다 보니 익숙해져서 뭐 나름 좋아졌다고. 내 이름에 의미가 있는 것도 부럽고 한국인들 대부분 의미를 가지고 있다니 흥미롭다고 했다)가 있었다.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건지 내가 없으면 이 동네를 노래 부르며 돌아다니는 네가 생각이 날 거 같다 (딱 한번 그랬는데 그걸 이 아저씨가 봄ㅎㅎ;)며 인사를 했다.
샤워를 하고 동네 슈퍼로, 소시지가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없어서 햄쪼가리랑 버스에서 먹을 과자를 샀다. 이제 이 슈퍼도 안녕이로구나. 요리를 하기 전에 짐을 먼저 다 정리하고 리셉션에다 침대는 다 치웠는데 키 반납만 나갈 때 해도 되냐니 흔쾌히 그러라고 해서 짐을 러기지룸으로 옮길 필요도 없었다.
햄 사온거랑 계란 두 개로 볶음밥을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밥이 생각보다 더더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밥 반 정도는 덜어두고 반을 볶았다. 근데 어쩐지 맛이 없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햄 자체가 간이 안된 햄이었어서 그런 거 같다, 카레가루도 넣어봤지만 소생이 안 돼서 일단은 그냥 담아두었다.
요리를 하고 있다 보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날 비가 오면 귀찮아지는데.. 생각해 보면 메스티아에서 떠날 때도 비가 왔는데, 좋아하는 곳을 떠날 땐 얼른 가라고 비가 오나 보다.
아침 겸 점심으론 밥이 반이 남았는데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 결국 짐도 줄일 겸 라면을 끓였다. 라면도 오늘따라 맛이 없는 걸 보니 내가 입맛이 그렇게 있지 않은 가보다. 떠나는 마당에 맛이 무슨 소용이야. 비 줄기는 그래도 약해졌다. 오늘따라 호스텔 커피도 떨어져 있다. 비가 오지만 기꺼이 우산을 들고 El tostada로 향했다.
오늘은 미디엄 사이즈로 텀블러에 담아달라고 부탁했다. 커피를 사들고 돌아오니 한시 반, 진짜 떠날 준비를 할 시간이다. 옥상에 올라가서 마을을 한번 둘러보고, L 할아버지랑 I가 같이 있길래 가서 인사를 했다.
I는 인스타그램을 달라고 자기를 오빠로 생각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란다. L 할아버지는 너의 여행엔 행복이 있을 것이라며 좋은 말을 해주었다. 둘에게 인사를 하고 내려와 양치를 하려고 방에 들어가니 벌써 내 6번 침대에 손님이 왔다.
일본인 아주머니셨는데 짧게 대화를 하며 나는 이제 떠난다고 이 침대가 여기서 제일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분도 여기서 스페인어를 배우며 꽤 오래 계실듯했다. 가방을 메고 나가면서 "여기 난 좋았는데 너에게도 마음에 들면 좋겠다. 내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했더니 "벌써 느껴지고 이곳에서 행복한 순간이 있으면 나에게 마음을 보내겠다"라고 해줬다.
가방을 앞뒤로 뒤뚱 메고는 수잔의 방 쪽으로 가봤다. 다행히도 수진이 밖에 나와있어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수장은 가방을 앞 뒤로 뚱뚱히 맨 나를 안아주며 몸 잘 챙기라고 해주었다. 그리고 주방에 있던 늘 행복하게 순간을 즐기는 아저씨도 스페인어로 잘 가라고 해주고 거실에서는 스태프 미까를 만났다.
미까가 너무 슬퍼해서 언젠가는 돌아온다고 얘기를 하고 고마웠다고 하며 인사를 나눴다. 리셉션의 친구에게도 마찬가지. 문을 닫고 길을 떠나는 게 참 그렇다. 내가 끝이 어느 정도 있는 여행을 좋아하는 건 이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지금보다도 더 힘든 이별의 시간을 맞이해야 했을 테니까.
사하라의 알리네를 떠날 때 메스티아의 무슈쿠디아니 매너를 떠날 때나 무이네를 떠날 때 샤오라우치우의 작은 집을 떠날 때 이렇게 슬펐었다.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인데, 다시 올 수 있을까? 어느 날에는 내가 다시 가고 싶은 곳들만 도는 여행을 한번 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거 같다.
그건 그렇고 가방이 엄청 무거워졌다. 10일 만에 가방을 메서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햇반 4개, 라면 4개, 간장, 샴푸, 액션캠 상자 등 그런 짐이 늘었다, 샴푸는 첫날 사놓고 호스텔에 있는 거 그냥 쓰느라 한 번도 안 썼다. 체감으로는 한 15킬로 되는 거 같았다.
ADO까지 힘들게 걸어서 도착. 역시나 버스 시간은 출발 시간이 아니라 탑승 시간인가 보다 2시 40분 버스인데 2시 40분부터 탑승을 시작했다. 장장 20시간의 여정이다. 원래 어딘가를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막상 가방을 메면 어서 도착하기를 바라게 되는 법이다.
탑승을 하는데 이미 꽤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역시 내 옆자리도 사람이 있다. 어디에선가 와서 산크리스토발에 들린 거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톡스틀라 쪽으로 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톡스틀라를 한 바퀴 돌아 위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거였다. 톡스틀라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탔다.
톡스틀라를 지나고 한번 검문이 있었다. 자동출입국시 받는 영수증 같은 애를 항상 같이 끼워 다녀 큰 문제는 없었다. 특이 사항이라면 나에게만 언제까지 멕시코에 있는지 물어봤는데 다행히 영어로 물어봐줘서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는 치아피스 주와 타바스코 주를 넘기 전 휴게소에 잠깐 서서 15분 간 쉰다. 물을 사려고 나갔는데 물이 안 보여 물어보니 이게 물이란다. 물에 라임이랑 소금(?)과 설탕 같은 걸 넣은 자체 제작한 이온음료 같았다.
밤이 찾아오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길을 달리고 잠에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내린다. 옆자리 아저씨가 나도 내려야 한다고 했다.
비야에라모사라는 도시였는데 여기서 25분 뒤에 출발할 거니 다 내리라고 한다. 버스 탑승 플랫폼을 비워줘야 해서 차고지 쪽에 들어가야 한다고 다 내려야 하는 것 같았다. 여기는 ADO 전용 대기 공간 앞에는 경호원을 두 명이나 두고 있었다. 치안이 좋은 도시는 아닌 건가?
전광판엔 이미 탑승하라고 나오지만 내가 다시 타야 할 버스는 아직 플랫폼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같이 내렸고 다시 탈 거 같은 사람 한 명을 콕 집어서 그 사람을 유의해서 본다. 그럼 내가 언제 다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내 옆자리 아저씨는 무채색 옷을 입어서 눈에 띄지 않아 빨간 후드를 입은 아저씨를 집어 중간중간 보고 있었다.
근데 그 아저씨도 그걸 눈치챘는지 우리가 타야 될 때가 되니까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쳐다봤는데 눈치를 채고도 기분 나빠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챙겨주셨다. 감사해라.
그렇게 무사히 다시 버스를 탑승하고 밥을 먹었다. 그때가 아홉 시쯤, 낮에 해둔 볶음밥을 먹기가 좀 눈치 보여서 (아무래도 많은 친구들이 샌드위치나 빵 같은 간단한 걸 먹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쉬는 동안 피자 한판을 들고 탄 친구들 햄버거를 사 온 친구들 등 모두 먹을 걸 들고 타서 먹는 걸 보니 먹어도 되겠다 싶어서 나도 꺼내서 먹었다.
밤이 되니 역시나 버스는 많이 추워져서 바람막이를 입고 남방을 덮고 잠을 잤다. 새벽에 한 군데서 사람들이 좀 내리고 또 한참을 가다가 아침 5시 반, 메리다에 도착하니 80프로의 사람들이 내렸다. 내 옆자리 아저씨도 드디어 내렸다.
해가 뜨는 걸 보며 조금 가다 보니, 이쪽 동선에는 휴게소 개념이 없는 건지(멕시코 시티에서 와하까에 갈 땐 휴게소 같은 곳에서 쉬었다) 메리다 외곽 쪽 식당에 세워 아침 먹을 사람들은 먹으라며 25분을 쉰다고 했다.
입맛은 없고 몸이 찌뿌둥해서 내려서 스트레칭을 좀 했다. 동부에 오니 공기가 후덥지근해지고 나무 모양이 바뀌었다. 많이 오긴 왔나 보다. 그래도 아직 4시간은 더 남은 여정, 그래도 자리가 여유로우니 갈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