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Equilibrium

by 돌이


3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아파트 단지 중앙에 놀이터가 있었는데, 사방을 초록색 펜스가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그 펜스 위로 올라가 펜스가 놓인 그 위를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한 것이 펜스는 윗부분이 돌출되어 있었다. 발을 헛디디거나 균형을 잘 못 잡는다면 넘어질 수 있고, 넘어질 때 자칫 잘못하면 돌출되어 있는 부분에 찍힐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책 <기억한다는 착각> 서문에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를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기억'하는 자아가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기억하는 자아는 우리가 내리는 거의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항상 그리고 심오하게 현재와 미래의 형태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을 기억할지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기억'하는 자아이다.


내 자아가 30여 년 전에 초록 펜스 위를 걷던 나를 왜 기억하는 것일까? 그 답이 바로 균형이다. 펜스 위에서 발을 어떻게 두었는지 생생히 기억난다. 처음에는 외줄 타기를 하는 곡예사처럼 펜스를 가운데 두고, 펜스가 발바닥 아치에 닿게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그러나 곧 익숙해졌고, 이 정도는 안전하다는 믿음이 생긴 이후에는 발끝을 펜스가 향하는 방향과 일치하게 두었다. 평균대를 걸을 때처럼, 양팔을 착 펴고 우아래로 흔들어가며 중심을 잡아 한발 씩 내디뎠던 기억이 있다. 발을 매개 삼아 나는 펜스와 힘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힘의 균형. 그 균형을 잡기 위해 무척 애를 썼던 첫 번째 기억이다. 누가 시킨 것도 가르친 것도 아닌데 나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쓴 만큼 몸을 써야 하고, 문학 작품을 읽을 만큼 비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 가족을 꾸렸다면 가족이 중요하지만 나에겐 그만큼 나도 중요하고,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이 있다면 나를 위한 시간도 있어야 한다. 직장과 가정에 사용할 에너지를 균형 있게 배분하고, 사용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모든 사안에서 균형이 깨지면 어떤 방식으로든 언젠간 티가 난다. 흰머리가 늘어난다던지,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나 장염에 걸린다던지, 화가 많아지고 버럭 소리 지르는 일이 빈번해진다. 나에게 있어서 힘을 균형 있게 나누는 일은 하루를 잘 살기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고, 나아가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잘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그 균형이 깨져있었다. 나를 위한 시간을 많이 양보했다. 직장에 과도하게 많은 에너지를 썼고, 파김치가 된 상태로 가정으로 돌아와 2차 소진을 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방치되었다. 글을 쓰고, 운동을 하는 내가 그런 것들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에너지를 써가며 나를 들여다보았어야 했다. 하지만 2차 소진까지 마친 내가 가장 먼저 포기했던 것이 바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나를 들여다보지 않는 일이 처음에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다만 평소와 같은 나를 '연기' 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일상을 일상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또다시 사용해야만 했다.


나는 점점 고갈되었고, 지금은 사실 어떤 한 가지 주제에 집중력 있게 몰입하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내가 쓰는 글도, 내가 머릿속으로 굴리는 생각도 충분치 못한 상태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내던져지는 기분이다. 다행인 점은 내가 제일 중요한 우선순위로 '균형'을 뽑았었단 사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소들 간의 힘의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나의 노력은 덜커덕거릴 테지만 계속이어질 것이다.


2026.02.22 365개의 글 중 89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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