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매(엄) 엄매 우리 엄매, 뭣할라고 날났던가. 어찌 갈꼬, 어찌 갈꼬. 우리 엄매 여기 두고, 나는 나는 어찌 갈꼬."
무녀가 운다. 그녀가 운다.
그녀는 압해도에서 목포로 나왔다. 또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길 따라 걸어서 진도 외갓집으로 가고 있었다. 영산마을만 지나면 이제 외가였다. 조금만 더 오면, 따뜻한 할머니가 품어줄 외가였다.
그녀는 외가에 다 오지 못했다. 다리가 아파서 못 왔던가, 가슴이 아파서 못 왔던가, 그렇게 그녀(고모의 딸)는 그 길에서 이승을 스스로 버렸다.
다 키운 곱디고운 딸이었다. 고모는 한달음에 친정으로 달려왔지만, 머리는 산발이었다. 옷은 걸친 듯 만 듯, 그저 넋이 나갔다. 딸마저 잃을 수 없던 할머니는 무녀를 불러야 했다. 무녀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정신없이 무구들을 챙겨 들었다. 악사들도 모였다. 산사람은 살려야 한다. 그렇게 마당에서는 또 하나의 씻김이 시작되었다.
"못 보내네, 못 보내네. 나는 나는. 못 보내네."
어미의 소리는 목에 잠겨, 가슴에 잠겨, 뱉어 내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그저 웅얼웅얼 거렸다.
어미는 놓지를 못했으나, 이제 굿은 막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녀는 하얀 천에 일곱 매듭을 지은, 긴 줄을 가져와 하나씩 풀고 있다. 고풀이이다. 망자의 한을 풀어 저승길로 인도하는 의식이다. 그녀가 가졌던 매듭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음인가, 그녀의 세상은 그저 잿빛이었음인가.
아쟁의 긴 줄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앵앵앵애앵 애앵앵앵, 구슬프게 울어대고, 악사들도 울고 무녀도 운다. 이제 어미도 울고, 모두 다 운다.
근본적으로 씻김굿은, 상처받은 자를 울리기 위한 장이다. 울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장이다. 한 맺힌 울음을 토해내게 하는 장이다.
씻김굿은 예술적인 울음의 장이다. 장구와 징과 아쟁과 대금은 오직 잘 울리기만을 위해 중무장을 했다. '크게도 작게도, 빠르게도 느리게도, 풀었다가 당겼다가, 깊게도 얕게도, 끌었다가 놓았다가,'를 한다. 악사들은 힘을 합쳐 '이래도 안울거여?' 울리기 시합을 하는 듯, 지상에서 최고로 슬픈 반주를 한다.
굿판에서는 그저 '일자로 죽 이어지는 선 같은' 소리는 없다. 다랭이 논의 구불구불한 선이다. 단순한 소리는 없다. 어찌 울음을 그렇게 단선의 소리로 내겠는가. 그래서 무녀는 목을 꺾는다. '어어어어어'를 꺾고 또 꺾는다. 반주도 꺾고, 강물도 꺾어 돌고, 길고 유장하게, 계속해서 꺾어 주고 또 꺾는다. 그래야 울음소리가 된다. 지상에서 가장 구슬프고 아름다운 울음소리가 된다.
무녀의 몸짓은 또 어떠랴. 팔을 올렸다 툭툭 꺾는다. 울기에 가장 적합한 몸짓이다. 몸짓마저 그렇다.
씻김굿은 위대하다. 울음의 뻔하지 않음이며, 울음의 예술적인 승화이다. 고달픈 삶이 만든 지혜이며, 자비이며 연민이 만든 가장 슬픈 축제이다. 슬픔은 차올랐건만, 아무 데서나 막 울 수는 없지 않는가. 진도 섬사람의 기품 있는 울음이며, 카타르시스의 대 향연이 바로 씻김굿이다.
그날 밤에도, 무녀와 악사는 모두를 울리기에 성공을 했을 것이다. 어미 또한, 그것이 어찌 하룻밤 울음으로 되랴만, 어쩔 수 없는 무녀의 성화에, 자식을 그렇게 보내고, 못다 한 것은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도시에는 울 곳이 없다. 이제 그 누구도 씻김굿의 굿판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무녀도 악사도 없으며, 울리기 경주도 하지 않는다. 울음도 돈을 내고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가 운다.
울음은 기쁨이다. 울음만이 희망이다. 울어야 산다. 울어야 살맛이 난다. 울음은 맺힘의 풀기이며, 자유를 향한 내딛음이다. 울어야 웃을 수 있음이다.
울 곳이 없는 도시에서, 이제 여인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거대한 경기장의 콘서트를 찾기도 하고, 때로는 세계에서 최고로 크다는 교회의 예배당을 찾아간다. 같이 울어주는 이가 많아 더 크게 울 수도 있다.
나는 숲에서 새들이랑 운다. 숲은 울 수 있어서 좋다. 아무도 '뚝'그치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웃기보다 울기를 잘해야 한다며, 새도 꿩도 노루도 함께 울어준다. 숲은 이렇듯, 나의 편안한 씻김판이다. 아름다운 씻김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