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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 Mar 13. 2021

누구나 다 하는 것을 난 이제서야 시작하고 기뻐하다

면허증을 신분증으로만 사용하는 그대에게

장롱면허

운전면허를 딴 후 오랫동안 운전을 하지 아니한 사람의 면허증을 속되게 이르는 말

야매

‘뒷거래’의 비표준어



앞 집 리사(Lisa)가 오늘은 많이 피곤해 보인다. 내가 아이들을 픽업하러 가겠다고 했다. 미안해하며 괜찮겠냐고 묻는다. “어브 코어스(of course)”

리사(Lisa) 딸과 우리 아들은 같은 학교 같은 반이다. 우리는 스쿨버스를 태우지 않고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픽 드랍 한다. 어제 오후엔 내가 픽업을 했으니 오늘은 앞 집 리사(Lisa) 차례인데 퀭 한 눈 밑으로 그늘이 진 게 영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다.

사실 나도 점심 먹은 후의 나른함으로 졸음이 살짝 쏟아져 의자에라도 앉아 졸고 싶었지만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이고 기쁘게 집을 나섰다.

바로 얼마 전이라면 내가 운전해서 누굴 픽업하러 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소위 장롱면허의 대표 주자였다. 그것도 장장 18년 동안이나 묵혀 두고 면허증을 신분증으로만 사용하던 운전 포기자.


“어머~실장님은 한 손엔 커피 들고 한 손으로 운전대 잡고 핸들링하게 생겼어요!”

운전도 못하고 커피도 안 마시는 내가 의외라는 듯 친하게 지내는 고객 한 분이 깜짝 놀란다.

커피 안 마시는 건 그렇다 쳐도 부동산 실장이 운전도 못하는 건 좀 그렇긴 하다.

더욱이 고객이랑 집을 보러 다녀야 하는데 운전을 못해 번번이 사장님을 운전기사로 쓰든지 아니면 중국 택시인 디디를 이용하거나 혹은 손님 차를 이용했으니 내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 손님이 놀랄 만도 하다. 뭐 하나 사소한 것도 내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려 고객 집 커튼까지도 일일이 골라서 세팅하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류실장이 남들 다하는 운전을 못해 뚜벅이 신세라니.

암만 생각해도 나도 놀랍다.


굳이 소심한 핑계를 대보자면 유학생 부인이라 자전거만 타고 다니느라 그랬노라고 항변을 해보지만 몇 년 전에 차를 구입했으니 마땅치가 않다. 사실은 면허 따는 과정에서부터 자의가 아니라 남편의 반강요에 의한 타의가 개입된 지라 시작부터 온전치 않았다고도 해본다. 사실 이것도 핑계다. 자의 건 타의 건 면허를 땄으면 운전을 할 줄 알아야 당연하지 않은가.

굳이 유전자 쪽 핑계를 대보자면 아빠 탓도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땐 이미 공무원이었던 아빠가 총각 때 잠깐 택시 운전을 했다고 한다. 기사를 두고 “오라이~” 하던 시절, 아빠는 시작한 지 1년 만에 택시를 다 망가뜨리고 그만두었다. 이런 아빠의 열성 유전자가 몸속에 숨어 있다가 나한테 전이가 된 것인지 희한하게도 난 어렸을 때부터 차가 무서웠다.

그러더니 기어이 힘들게 면허를 따 놓고도 운전대만 잡으면 한없이 작아졌다. 웬만하면 주눅이란 것이 뭔지 모르고 살던 내가 운전석에만 앉으면 갑자기 소심하게 뭐부터 시작해야 해? 를 반복했다. 길치, 몸치, 음치 등 이유 없이 뭐에 약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지만 차치도 있었던가?

멀쩡한 정신으로 반듯한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어 비뚤배뚤 가기는 참 쉽지 않은데 내 눈에는 차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중앙선도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내 한심한 꼴을 참다못한 남편은 나에게서 운전대를 도로 가져갔다.

“당신 운전면허증은 나라에 다시 반납하자. 이렇게 하다가 여럿 다치겠어.”


운전을 처음 배우던 그때로 돌아가 생각하면 첫 단추부터 잘 못 끼웠다.

도봉면허시험장에서 필기시험을 한 번에 합격하고 밖을 나서는데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 전단지 한 장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40만 원으로 운전면허 딸 때까지 책임지도 해 드립니다>

야매로 운전을 가르쳐 준다는 전단지였다.

당시에도 시험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두 종류였다. 운전면허시험장에서 보는 것과 운전면허학원에서 보는 것.

운전면허시험장은 외부에서 운전을 배운 후 정식으로 시험만 볼 수 있는 곳이고 운전면허학원은 운전을 직접 가르치고 바로 그곳에서 시험을 쳐 상대적으로 운전면허학원이 훨씬 면허 따기에 유리한 조건이다.

원래 계획은 운전면허학원으로 등록해 좀 쉽게 면허를 따는 거였는데 40이라는 숫자를 보고 갑자기 마음이 변덕을 부렸다. 솔깃했다. 운전면허학원은 육십몇만 원 하던 시절이니 이십만 원 넘게 차이가 났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이십몇만 원을 아끼겠다고 야매를 선택했나 싶지만 그때 당시 돈 가치와 이십 대 젊은 혈기엔 야매로 운전연수를 선택하는 게 탁월한 선택이다 싶었다. 훗날 어떠한 고난이 펼쳐질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말이다.

바로 운전 연습에 들어갔다.

“2종으로 하실 거죠?”

여자이니 당연히 2종 면허에 도전할 거라 생각했는지 한 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물었다.

“아뇨. 1종으로 딸 거예요.”

난 먼 훗날 일어나지도 않을 <트럭 몰고 과일장사라도 해야 할지 모르니까>라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1종 면허에 도전을 했다.

‘기왕 따는 거 까잇거’ 하면서.

당시 쌍문동에서 살던 난 의정부 외곽까지 운전을 배우러 다녔다. 운전을 가르치던 아저씨가 의정부 외곽 어느 운전학원에 사용료를 내는지 그곳에서 기능부터 하나씩 배워 나갔다. 야매라서 그런지 아저씨 가르치는 것도 대충이고 나 또한 시작부터 자의가 아니어서 그런지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지 않고 기아 넣는 것은 배워도 맨날 처음처럼 새로웠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저 시간만 때우다 오는 시간들이 반복되었다. 트럭은 왜 또 그렇게 낡았는지 내 운전 솜씨를 탓하기에 앞서 덜덜거리고 청소가 안되어 있는 트럭이 운전을 더 배우기 싫게 한다고 투덜거렸다. 심지어 운전을 배우러 갈 시간만 되면 배가 아파왔다. 살면서 뭘 배우러 가는 길에 배까지 아팠던 건 처음이었다. 아이들이 툭하면 배가 아프다고 한 건 <하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구나>가 이해됐다.


운전이 적성에 안 맞는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난 기사를 두고 살 팔자인가 보다>라며 말도 안 되는 거만으로 위안을 삼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거 운전은 안 하고 살더라도 면허는 따 놔야지 싶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겨우 기아 작동법을 익히고 T자와 U자, S자 그리고 평행 주차까지 몇 날의 연습 끝에 시험에 도전했다. 트럭에 앉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불합격입니다. 내려와 주세요>라는 안내 멘트가 들렸다. 기계는 정직했다.



다행히 재시험을 보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1종이라 그런지 시험장에 온 사람들은 나 빼고 모두 남자였고 그들 또한 번번이 떨어져 매번 기능 시험이 있는 날짜마다 낯익은 얼굴들이 계속 보였다. 나도 그들도 “아, 또 오셨네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계속 마주쳤지만 시험에 떨어진 게 서로 창피하니 눈을 슬쩍 피한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네 번……정말 우표를 수집하듯이 시험 인지대를 모아갔다. 인지대가 하나 더 추가될 때마다 내 절망감도 쌓여 갔다. 할 수만 있다면 인지대 없이 시험을 보고 싶었다.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도전을 하라고 했던가? <이만하면 붙겠지>라는 자신은 없었지만 시험을 볼 때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가지고 있었는데 매번 떨어질 때마다 속이 상했다. 어떤 날은 눈물도 찔끔 나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서로 안면 튼 얼굴들이 매번 보인다는 거다. 내가 여자라서 떨어진 게 아니다. 남자인 그들에게도 정식 면허시험장에서의 1종 시험은 한두 번 만에 바로 붙을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시험에서 떨어질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위로하며 다시 도전했다.

그렇게 기능에서만 아홉 번을 떨어졌다. 칠전팔기라고 했는데 난 이미 구전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한 것을 이제야 포기한다는 건 억울하고 나 스스로의 자존심에 마음이 굽혀지지 않는다.

드디어 열 번째 인지대를 붙였다. 더 이상 붙일 공간도 없어 보인다. 이제 낯익은 얼굴들도 점차 사라지고 야매로 가르쳐주던 아저씨도

“참 징하네요. 아홉 번이나 떨어지고. 그냥 2종 보시지 왜 1종을 딴다고 사서 고생한대요?”

아저씨 눈에도 내가 한심해 보였을 터이다. 나는 그때 그 순간 왜 뜬금없이 트럭 과일장사를 떠올리고 1종을 택했을까? 가끔 과한 상상력이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다른 이까지 힘들게 한다는 생각에 자괴감까지 들었다.



구전십기! 제발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열 번째 시험에 도전했다.

애초부터 여러 핑계를 대서 하기 싫었던 내 마음 따윈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저 꼭 붙어야 한다는 기도를 백 번은 한 것 같다. 드디어 도전 열 번만에 기능 시험에서 붙었다.

합격의 설렘은 정말 아주 잠시 누릴 수 있었다. 기능 다음으로 도로 주행 시험이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오래전 일이라 도로주행 연수를 몇 번 받고 시험에 응시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도로주행 시험에서도 세 번이나 시험을 봤고 세 번째 떨어졌을 때는 시험관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피함 보다 속상함이 앞서 펑펑 울었던 기억만 난다.

더 이상 야매로 가르쳐주던 아저씨를 힘들게 하는 것도 미안하고 <끝까지 버티리>라던 내 오기도 무너져 결국 돈을 더 들여 운전면허학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의 삼십만 원을 더 냈던 거 같다. 애초부터 편하게 학원으로 갔으면 좋았을 걸 돈 아끼겠다고 했다가 더 큰돈과 아홉 번이나 떨어진 기이한 이력들만 나에게 남았다.


차에 대한 무심하고 둔한 감각은 말레이시아로 이주하고 나서야 사라졌다. 중국에선 그나마 디디를 부르면 몇 분 안에 와줘서 급한 내 성격에 충족이 되었는데 동남아시아용 택시 그랩은 한 번 부르면 최소 오 분에서 십 분이고 이 마저도 어떤 때는 기사가 중간에 취소를 한다.

그리 급할 게 없는데도 내 마음이 그랩에 대한 느림이 허용이 안됐다. 차라리 내가 하자 싶어 운전 연수를 다시 받았다. 섬나라 국가의 특징인 오른쪽 핸들링이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차피 초보한테는 오른쪽, 왼쪽 다 같은 처지니까.


운전을 다시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넘은 지금은 원하는 곳은 어디든 다닌다. 긴 시간 운전을 해도 어깨가 안 아픈 걸 보면 체질인가 보다 싶다. 직접 운전을 하니 남편이나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마저 도울 기동력도 되니 내게 또 다른 형태의 자유가 생겨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왜 이제서야 운전을 시작했는지 아쉽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운전을 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

인생에서 '무엇을 시작하는 때!'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결론 지어본다. 언제든 내가 진정 원해서, 정말 간절히 원할 때 시작하면 그걸 누리는 행복은 훨씬 큰 거 같다. 그리고 그걸 누리는 일상이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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