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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 Aug 22. 2021

행복, 생각보다 가벼운

행복하다고 소리 내어 말해도 좋아

행복, 결코 무겁지 않은



몇 년 전 대만 여행을 하다가 '스펀'이라는 유명한 여행지에서 "행복역"이라는 기차역의 표지판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행복이고 최후의 목표가 행복이거늘 굳이 역 이름을 행복 역이라고 지은 것은 사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역 앞에 서있는 사람들 지금만이라도 <행복해야 해!>라는 간곡한 말처럼 느껴졌다.

"행복역"이란 기차역은 일본 북해도 오비히로라는 곳에도 있다. 1987년부터 기차가 정차하지 않는 플랫폼임에도 사라지지 않고 관광지로서 가치를 탈바꿈한 것은 인류에게 그만큼 행복에 대한 욕망이 무엇보다 우선순위임을 증명한다.

이렇듯 행복을 권유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왜 행복지수를 산출하며 행복의 양을 가늠하는 걸까?


엊그제 한량학교 작가님이 툭 던져준 아침 독서 메모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각자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에 대한 생각을 써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아무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막막했다. 행복이라는 단어만큼 흔하고 자주 쓰이는 말이 없는 것 같은데 왠지 행복이라는 말이 무겁게 느껴졌다. 인간이 살아가는 최고 목표가 늘 행복이라고 들어와서 그런지 이 행복이라는 건 아무나 누리는 게 아니고 최선을 다한 자만이 행복이라는 화살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난 요즘 지속되는 코로나로 많은 열정을 잃고 그저 겨우 불행만 면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행복했던 기억이 까마득 하기에 뭘 써야 할지 난감한 채로 시간을 보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써져 있다. 이 내용만 얼핏 보면 행복이란 내 삶 전체가 완벽한 만족을 느끼는 상태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행복해라고 뚜렷이 떠올릴만한 기억이 없는 걸까?

반면 불행은 "행복하지 아니함"이라고 해석되었다. 결국 바꿔 말하면 행복이란 불행하지 않은 상태면 되는 것이다. 행복이란 느낌처럼 완벽한 만족의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닌 그저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벼운 것이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표현만큼 행복은 고만고만한 일상에서 늘 가벼운 상태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늘 목표라는 거대한 이름으로 행복이라는 이름에 쓸 데 없는 무게감을 실어왔다.





행복을 찾아 떠나온 길


벨기에 작가 메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에서 틸틸과 미틸 남매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이곳저곳 헤매다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집에서 기르던 새가 파랑새임을 알고 진정한 행복은 바로 곁에 있음을 형상화했다. 바로 내가 안주하고 있는 곳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이 교훈은 보편적인 삶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나에겐 그저 한 편의 동화일 뿐이었다.


내가 머물러 있는 자리에서 난 매번 다른 세상을 꿈꾸었고 내가 살아보지 않은 세상엔 좀 더 색다른 행복이 반드시 존재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앉은자리들에서 불행하진 않았지만 만족하지도 않았다.

몇 년씩 안주하던 도시에서 마음이 떠나면 그다음 이동지는 신기루처럼 신비로워 보였다. 그렇게 신기루를 쫓아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하지만 참 신기하게도 미련이 없을 것 같았던 지나온 흔적을 돌아보면 나름나름 다 행복했었다.

거쳐왔던 도시마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었고 그곳에서 지냈던 추억들은 예쁘게 포장시킨 것도 아닌데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행복이란 글자로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러겠지. 길어진 코로나 일상 속에서 갑갑하게 갇혀있는 듯한 현재가 지나고 보면 가족들과 가장 가까이 오랫동안 함께 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기억되리라.

행복은 저만큼 멀찌감치 떨어져 과거형으로 들여다봐야 더 값지게 느껴지나 보다.





행복하다는 말



진심으로 행복해서 "행복하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난 지나온 삶 가운데서 특별한 행사를 치르고 있지도 않았고 그저 툭 던져진 하나의 소소한 일상 가운데 앉아 있을 뿐이었다.

스물몇 살 그 당시 난 집을 떠나 외지에서 자취 생활 중이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본가에서 엄마와 아빠, 난 갑작스러운 야외 소풍을 준비했다. 삼겹살을 사들고 불판을 준비해 집에서 멀지 않은 캠핑장으로 향해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불판에선 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고 자리 잡은 곳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엔 흐름이 고요한 저수지의 물결과 별 욕심도 걱정도 없었던 내 잔잔한 생활이 오버랩되어 참 행복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 행복하다."

라고 내뱉은 이 말에 아빠는 껄껄 웃으며 더불어 행복해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 스스로가 "행복하다"는 말을 소리 내어 말했던 순간을 기억한다는 건 그만큼 그 횟수가 아주 적다는 뜻이다.

내가 먼저 나서서 "행복하다"는 말을 하면 그 찰나를 나누는 곁에 있는 이도 더불어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왜 이 말을 아끼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나온 시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은 많았다. 다이내믹하게 화려한 행복은 아니었지만 영화 "사월 이야기"정도의 잔잔하게 따스한 감동을 주는 일상들이 내 곁에 자주 머무르다 흘러갔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교정엔 벚꽃나무가 가득했다. 봄이 되면 희고 고운 벚꽃잎들이 사방에 흩어지며 영화 "사월 이야기"처럼 순수한 낭만을 저절로 만들어냈다. 그렇게 아름다운 교정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깔깔대고 웃고 날리는 꽃잎과 함께 뛰어다니던 시절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들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한 번도 함께한 친구들한테 너와 함께 하는 이 시간들이 행복하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렇게 빛나던 순간에 진정으로 울리던 마음 밑바닥의 소리를 말로 표현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그 순간 함께 했던 친구에게, 그리고 나에게 "행복하다!"라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


불혹의 나이를 살다 보니 젊은 날 소소함에서 받았던 찌릿한 행복한 감정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감정의 흔들림이 별로 없어지니 불행하지도 않은데 행복한 것도 아닌 듯한 고요함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옛날 어른들은 좋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면 불행이 시샘을 한다고 일부러 부정적인 말로 돌려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살아보니 좋은 감정은 자꾸 좋다고 말로 해야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행복하다는 말을 소리 내어 말해야겠다. 아이를 안아줄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일이 있어 현재를 유지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내 곁에 머물러 있는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고, 그저 나로 사는 게 행복하다고.

행복이라는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은 목표가 아닌 현재라는 걸 늘 잊지 않길 바란다.

남과 비교해서 얻는 행복이 아니라 자신이 머물러 있는 자리에서 찾길 바란다.

나에게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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