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과거의 자신을 변호하며 살 수 있을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가즈오 이시구로

by 트루노스


2026.2.5 완독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가즈오 이시구로 284P

An Artist of the Floating World


젊은 시절, 일본의 제국주의의 선전을 위해 재능을 소모했던 노년의 화가가 '딸의 혼담'을 계기로 과거의 삶을 돌이켜본다.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절제된 문체로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오명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평생을 바친 신념이 시대의 변화로 부정당했을 때,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해서 스스로를 책망하며 보낼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토록 믿었던 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라며 자신도 느끼고 있는 당혹감을 합리화하고 기억을 왜곡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문득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경고한 ‘사유의 부재’가 겹쳐 보였다. 자신의 행위가 초래할 도덕적 파장보다 ‘직업적 성취’와 ‘전문성’이라는 성벽 안에 자신을 가두었다는 점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다. 아이히만이 행정적 효율성에 매몰되어 인간에 대한 사유 자체를 버렸다면, 오노는 시대의 광풍 속에서 비판적 사유를 스스로 중단해 버렸다.


자신의 과오를 단지 '통찰력이 없었던 평범한 인간의 불운'으로 규정하며, ’조국에 대한 충성으로 일한 사람들을 전범이라 부를 수 없다(p.77)‘고 항변하는 대목은 그 전형이다.

아이히만이 ‘생각의 부재’라면, 오노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택적 사유’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에 편승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삶이, 시대가 바뀌었을 때 어떻게 평가받는가에 대한 쓸쓸한 초상화에 가깝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쩌면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며 인정해야 하는 ‘참담한 이해’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때로 틀린 신념을 생의 근거로 삼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어제의 애국이 오늘의 죄악이 된 가치 전도의 시대, 주인공은 소심한 반성 뒤에 은밀한 자부심을 숨긴 채 과거를 소환한다. ’지난 삶의 결함을 인식하지만 이제 그곳에 신경 쓰는 사람은 우리 자신뿐(p.269)‘이라는 오노의 말은, 이 기묘한 부유(浮遊)의 끝에서 그가 마주할 화해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바치는 고독한 위안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한다.


예술과 권력의 결합이라는 국가적 대의를 화폭에 담았던 다비드와 체제 순응 뒤에 비극을 숨긴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술이 거대한 시대의 물결과 충돌하며 내는 ‘서글픈 파열음’처럼 느껴진다. .


일본과 영국으로 배경은 다르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 <남아 있는 나날>과 많이 닮아있다. 두 작품 모두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앞에 선 개인의 무력감과 잘못된 대상에 바친 충성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개인의 상실감을 넘어 시대가 낳은 집단적 상실감을 투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과거의 자신을 변호하며 살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가 지키고 싶은 것은 과거의 진실이 아니라, 무너져버린 현재의 자존감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던지는 질문들이 입체적이라 감상이 꽤 길어졌다. 내 안의 여러 '생각의 섬’들을 부유하듯 오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아마 가즈오 이시구로 문학이 가진 힘일 것이다. 오노가 마주한 '자신과의 화해'는 부유하는 기억 위에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바치는 고독한 고해성사일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의 독서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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