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괜찮아

by 워니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 피부가 좋아졌다."

처음엔 가벼운 인사성 빈말인 줄 알고 가볍게 흘려들었다. 내 피부가 좋았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30분의 짧은 시간 동안 같은 말을 서너 번은 들은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뭔가 찜찜했다.

'빈말이라도 고맙다고 말해줄 걸 그랬나'

상황에 적절한 인사말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나를 자책하다가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으로 내몰기도 하면서 거울 앞에 앉아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한때 나는 유전적 기질과 복구 불가능해 보이는 피부 상태 때문에 성형외과에 가려고 벼르던 적이 있었다. 팔순을 넘긴 친정 부모님 얼굴을 보면 나의 태생적 문제를 알 수가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눈꺼풀과 눈꼬리가 처져서 인자해 보이기는 해도 눈의 3분의 2 정도가 눈꺼풀에 덮여 시야를 가려 무척 불편해 보였다. 상안검 수술을 권해 보기도 했지만 불편하지 않다고 할 뿐이었다. 엄마의 피부는 무척 하얗고 고왔는데 피부가 얇아서 중년이 되기 전부터 잡티가 많이 생겼고 노화가 빨라 얼굴에 주름이 많다.


생각이 많으면 걱정이 되고 걱정이 많으면 스트레스가 된다. 바쁘게 살아오느라 피부 문제가 스트레스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보톡스나 필러 시술을 받고 피부숍에 다니는 일이 당연시되는 꽉 찬 중년들 이야기가 남일 같지 않아 귀가 솔깃했던 적이 많았다. 얼굴을 뒤덮어가는 주름이 미워지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겁 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이 시간을 허송했다고 느껴질 때이다.


나이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던 그림책 속 할머니가 생각났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의 주인공 할머니는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할머니다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평생 익숙하게 해와서 잘 해낼 수 있는 케이크를 만들거나 나무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서 콩을 까는 일을 하다가 졸기도 하는 생활을 좋아한다. 그런 할머니에게 나비처럼 가벼운 몸으로 개울을 펄쩍 뛰어넘고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같이 잡자고 하는 고양이가 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하지만 난 늙은 할머니인걸"

"하지만 난 아흔여덟 살인걸"

언제나 할머니다운 일과 잘하는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섯 살짜리 고양이가 할머니 생일에 심부름으로 양초를 사 가지고 오다가 냇가에 양초를 빠트려 5개만 가지고 돌아온다. 케이크에 5자루 초를 꽂아 불을 붙이고 생일을 맞은 할머니는 이상한 용기를 내게 된다.


냇물을 뛰어넘고 물속에 들어가 치마로 물고기를 잡아 올린다.

마지막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나 어째서 5살이 되지 않았을까"


작가는 단순하지 않은 것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작품에서 무거운 주제를 간결하고 가볍게 정의하는 태도는 작가의 성향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암으로 2년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난 후에 '지금이 인생 중 가장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할머니와 시한부의 삶은 한정된 시간이 짧다는 것이 같다. 사노 요코는 이런 짧은 시한부의 시간조차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는 태생적 문제와 바쁘다는 이유로 피부에 관심이 없었다. 주름이 눈에 거슬리고부터는 전문가에게 얼굴을 내밀었다가 타박받는 것이 싫어서 노화를 받아들이고 얼굴에 집을 지은 주름들이 밉상이 아니기만을 희망했다. 그런데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지인의 이야기가 맞았다. 내 피부는 탄력도 있고 팽팽해진 느낌에다 주름도 예전과 달리 확연히 줄어 보였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불규칙적이던 일들도 사라지고 일상은 평화로워지면서 피부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주름진 얼굴로 살아가는 일이 겁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이 인생 중 가장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사노 요코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를 통해 아흔아홉 살이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을 느껴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이의 무게를 어깨에 무겁게 지고 사는 일은 힘든 일이다. 나이만큼 철들지 않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나이에 걸맞게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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