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수레

by 포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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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을

나는 오래도록 다르게 믿고 있었다.

속이 비어 있어도

밀고 나가면 된다고.

일단 부딪치면 길은 생긴다고.

준비보다 당당함이 앞섰고,

근거 없는 낙관은

용기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학교에서의 벼락치기 발표,

직장에서의 우연한 인정은

그 착각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겉은 번지르르했지만

속은 비어 있던 기둥.

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잘도 굴러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멈춘 날이 있었다.

지역 국제교류 행사.

떠밀리듯 통역 자리에 섰다.

조명은 뜨거웠고

연사의 말은 깊었다.

전문용어와 낯선 억양 앞에서

내 준비는 종잇장처럼 얇았다.

몇 분이 지나자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고

나는 단어만 붙들고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간 것은

어색한 침묵과 어설픈 문장이었다.

연사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안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그날의 박수는

격려가 아니었다.

허세를 해체하는 소리였다.

그 이후로

나는 쉽게 나서지 않는다.

“당신밖에 없어요.”

그 말이 칭찬인지,

책임 회피인지

한 번쯤은 곱씹는다.


세상에는

속을 채우지 않아도

앞으로 밀어 올리는 말이 많다.

그러나 수레는

소리가 아니라

무게로 굴러간다.

그날 이후

나는 요란해지기보다

조용히 채우는 법을 배우고 있다.

비어 있던 자리에

천천히 무게를 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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