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잎의 속삭임

by 포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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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를 사랑한다.

달콤한 향이 바람을 타던 어린 날부터

포도는 언제나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겨울이면 아이들이 작은 칼을 들고

차가운 밭머리에 모여 섰다.

고사리 손으로 포도나무껍질을 벗기기 위해서다.

싸라기눈이 손등에 닿아 사라지는 동안에도

맨살을 드러낸 포도나무는 묵묵히 추위를 견뎠다.

새봄을 맞기 위해, 그 긴 겨울을 품고 있었다.


2월의 바람 속에서

지난해 열매를 지탱했던 가지들이 잘려 나간다.

아궁이의 불씨가 되거나,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던 가지들.

그 조각들 속에도 따뜻한 시간이 서려있다.


내가 자란 집은 언제나 포도밭 한가운데 있었다.

초록이 피어나는 봄,

햇빛이 열매를 키우는 여름,

잎이 황금빛으로 흐드러진 가을,

하얀 고요가 내려앉는 겨울까지―

자연은 사계절 내내 나를 가르쳤다.


겨울나무의 가지를 자르면

맑은 물이 맺힌다.

그 투명한 방울이 바로 나무의 숨결이었다.

3월의 바람에 뿌리가 다시 깨어나고,

작은 꽃눈이 성냥개비처럼 모양을 갖추면

나는 그 작은 기척에도 가슴이 설렜다.


“감사합니다.”

손톱만 한 새 잎이 돋을 때마다

나는 이유도 없이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즐겁게 일했을 뿐인데

귀한 열매를 맡겨주신 손길이 마음을 적셨다.


4월의 새벽은 아직 춥다.

이슬을 머금은 잎을 바라보며

*밤새 얼마나 떨었을까*생각한다.

가능하다면 내 이불을 덮어주고 싶다.

입김을 불어 잎을 녹이며,

새 줄기가 고운 손길처럼 넝쿨을 뻗는 모습을 기다린다.

그 작은 손은 언제나 신비롭고, 언제나 아름답다.


5월이면 포도밭은 초록의 바다다.

넓은 잎 사이에 숨어 흔들리는 송이들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들 같다.

어젯밤보다 조금 더 자란 열매를 보면

세상이 조용히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부드러운 포도꽃 향기가 바람을 타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향기를 어디에 넣어 오래 간직할 수 있을까.*


한여름의 햇살아래서

잎들이 손을 흔들 듯 바람에 흔들린다.

햇볕이 뜨거울 때면 나는 잎을 덮어주며 속삭인다.

“괜찮아, 조금만 더 버티렴.”

포도밭은 그때 가장 아름답다―

초록과 붉은빛이 겹친 한 장의 그림처럼.


그러나 자연은 때로 거칠다.

장마소식이 들리면,

바람의 기척만으로도 마음이 조여 온다.

그럴 때면 나는 하늘을 향해 조용히 기도한다.

“올해도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세요.”


8월 초, 포도는 붉게 익어간다.

수줍은 신부의 얼굴처럼 가볍게 물이 드는 시기.

어느 날 아침, 까치 울음에 잠에서 깼을 때

방 안에 포도향이 가득 번져 있었다.

나는 급히 밭으로 나가 향기를 가득 들이켰다.

가슴 깊이까지 향이 차오를 때까지.

*이 향을 그림으로 옮기면 어떤 색일까.*

아마도 안개처럼 흐린 분홍빛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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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이 지나면 잎이 황금빛을 띠고

까맣게 익은 열매들이 가지마다 탐스럽다.

나는 그 보물 앞에서 말없이 미소 짓는다.

“고맙다, 얘들아.”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 같다.


가을이 오면

내가 입 맞추던 잎들이 바람에 실려 하나둘 떨어진다.

빈 가지를 바라보다가 떨어지기 직전의 잎을 붙잡아본다.

인연이 다하면

정도 바람 앞에 서서히 마른다는 이치를

낙엽이 다시 일깨워준다.

쓸쓸하지만 고요한 깨달음이 흐르는 계절이다.


겨울이 오면 포도밭은

눈과 침묵으로 가득해진다.

고랑 사이엔 까치의 발자국 몇 개만 남아

누군가 다녀갔음을 조용히 알려준다.

나는 “후―”하고 입김을 내쉰다.

그 속에는 아쉬움과 허전함,

그리고 사랑이 함께 섞여 있다.


열매가 가득할 때는

그토록 자주 드나들던 밭이었는데

겨울이 되면 오가는 발걸음도 드물다.

어리석은 건 자연이 아니라

언제나 나였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따뜻한 밥 한 그릇,

몸을 감싸주는 새 옷 한 벌,

여기서 나는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살았다.

조용히 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마음을 올려드린다.

“귀한 열매를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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