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리

by 포도향기
image.png


새벽은 언제나 소리로 먼저 찾아왔다.

서른 가구 남짓 모여 살던 산골 마을.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던 풍경도,

저녁마다 들리던 이야기 소리도 어느새 희미해졌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자 마을의 숨결도 조용히 가라앉았다.

새벽을 깨우던 닭 울음은 오래전 사라졌다.


닭이 울지 않아도 그 시간에 눈을 뜬다.

길가에 붙어 있는 우리 집은 작은 초소 같다. 새벽길을 오가는 발자국

하나에도 방바닥이 미세하게 울린다.

그 울림을 듣고 있으면, 이 새벽이 오래전부터 나를 깨워온 듯한

기분이 든다.


새벽 4시 30분.

가장 먼저 교회 봉고차 엔진소리가 어둠을 가른다.

뒤이어 털보 영감의 경운기 소리가 골짜기 전체를 흔들 듯 울린다.

수십 년간 땅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리듬이 그 소리에 배어 있다.


5시가 되면 달수 형님의 트럭이 지나간다.

어려운 형편을 말해주듯 엔진 음이 유난히 거칠다.

작년까지 함께하던 형수님의 목소리가 사라진 새벽길은 더 조용하다.

이 시간대에 지나가는 차는 몇 대 되지 않지만, 그래서인지 소리

하나하나가 선명히 남는다.


요즘 새로 나타난 외딴집 강아지가 울음을 터뜨린다.

도시에 있는 딸의 사정으로 맡겨진 개라 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울음이, 비어 있는 새벽을 크게 메운다.

투박한 구두소리는

마을 이장이 지나는 소리이고,

신발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는

보나 마나 팔자걸음의 순덕이 아버지일 것이다.


농번기지만 일손은 예전 같지 않다.

나는 여전히 6시가 되어야 이불을 벗는다.

그 사이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자동차 소리가

그날의 기운을 가볍게 알려준다.

새벽의 작은 소리들이 이 마을의 하루를 예고하는 듯하다.


얼마 전부터 이 조용한 새벽에 낯선 언어가 섞이기 시작했다.

포도밭 일을 돕기 위해 온 이들의 목소리다.

생각해 보면, 이 마을의 조상들도 자신들이 알지 못하던 언어를 들으며

어리둥절했던 새벽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남아의 말투와는 달랐겠지만, 한 시대에는 낯선 군대의 언어가

이 산골의 아침 공기에 스며들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사람은 바뀌고, 그때의 언어와 지금의 언어가 다를 뿐

낯섦이 마을을 찾아오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새벽이 가장 고요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친다.

이 마을의 시간은 지금도 아주 느린 속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사라진 소리들 뒤로 새로운 소리가 자리 잡고,

그 소리들이 또 언젠가는 기억 속으로 멀어질 것이라는 것.

세월은 언제나 이렇게 조용한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삼거리 초소 같은 이 집에서

사라지는 소리와 새로 들어오는 소리가 교차하는 장면을 듣는다.

기억 속에 저장된 소리들은 멀어진 듯하다가도

어느 날 불쑥 가까이 다가와 마음의 한 자락을 흔든다.

언젠가 다시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아마 이 마을의 새벽닭 울음을 가장 먼저 찾게 될 것이다.

오늘도 이불속에서 방바닥의 작은 진동에 귀를 기울인다.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를 이 새벽의

마지막 결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작가의 이전글포도잎의 속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