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아침
아침 여섯 시 반, 어김없이 알람이 울렸다.
12월 초순의 공기는 제법 쌀쌀했지만, 몸에 밴 루틴은
망설임 없이 나를 일터로 밀어냈다.
회사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눈을 감는다.
길지 않은 이 시간은 내 생각과 주장을 내려놓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시간이기도 하다.
점심시간에는 동료와 함께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나이가 많은 내가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생은 길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내일 아침에도 해는 정확한 시간에 뜰 것이라며 그를 다독였다.
흐르는 세월 속에 기계처럼 움직여온 삶의 패턴,
2. 멈춰버린 시계
스물다섯 해째 이어온 고요한 질서.
그 질서가 오늘 무너질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퇴근 무렵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는 나의 마지막을 단 5분 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물 한 컵을 입에 대려던 찰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숨이 막혔다. 공기가 폐로 들어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바닥에 뒹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3. 시간의 냉정함
“119 좀 불러줘.”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단순한 소동이 아니라는 것을.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예감이 전신을 단단히 죄어 왔다.
머릿속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이 짧은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가장 먼저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한다고, 한 번만 더 말하고 싶었지만,
시간은 간절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힘을 다해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을 찾았다.
그 말은 변명도, 요구도 아니었다.
“저의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 순간,
의식은 서서히 나를 떠났다.
나는 빛없는 어둠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4. 또 다른 나의 발견
무의식의 세계는 기묘했다.
가슴을 짓누르던 통증과 호흡곤란은 사라지고,
어느새 나는 작은 구름이 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낯선 공간에서 제삼자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경계에서 나는 문득 죽음의 본질을 생각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은 의사의 사망 선고도,
화장터로 향하는 길도 아닐 것이다.
스스로 관속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또렷이 자각하는 순간,
아마 그때일 것이다.
5. 처음 들어본 음성
내가 누워 있는 병실과 장례식장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장면들은 논리 없이 이어졌지만,
공포만큼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나는 밧줄에 묶인 듯 도망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기록자의 본능을 버리지 못했다.
이 공포, 이 무력감, 이 절대적인 고립의 감각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돌아간다면 이 경계를 증언해야 한다고.
그때, 나를 싣고 가던 영구차가 돌연 방향을 틀었다.
그 장면이 환시였는지 비유였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내 의지가 아닌 어떤 힘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는 사실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압도적인 그 음성은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엄중함 그 자체였으며,
잠들어 있는 온 세상을 깨울 만큼 공간 전체를 흔들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대답했다.
“아니오.”
6. 오염된 세상
이윽고 눈앞에 온 세상이 악마의 세력에 휩쓸려 수많은 인간이
미신에 빠져 더러운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정, 병원, 사무실 할 것 없이 모든 컴퓨터 모니터에
악마의 손길이 뻗쳐 있었다.
우상의 우두머리를 ‘아버지’라 부르며 거짓말에 현혹된 자들은
물질을 바치며 가르침 받기를 애원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내 마음에 불덩어리가 일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일어나 외쳤다.
7. 미신과의 전쟁
“저자의 말을 믿지 마라! 모든 것이 거짓이다! ”
이어 우두머리를 향해 너의 말이 진실이면 숨어있지 말고
나와서 당당하게 맞서보자고 호통을 쳤다.
추종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맹신자 몇 명이 다가와 입을 막으려 제재했다.
나는 더욱 힘을 내어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
내 팔이 그들을 향할 때마다 그들이 꼬꾸라지고 제사상은 엎어졌다.
결국, 밖으로 나온 우두머리는 늙고 초췌하며
거짓으로 뭉쳐진 더러운 노인이었다.
나는 세상 앞에 모든 거짓을 밝히고 사죄하라 명령했다.
그는 체면을 차리려 무릎 꿇는 시늉만 하며 버텼지만, 재차 호령하자
마지못해 작은 소리로 자신이 거짓의 우두머리였음을 고백했다.
소요가 일어났고, 그로부터 나는 전국의 미신 신봉자들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8. 사막에서 생수 찾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갑자기 온몸을 옥죄는 고통이 몰려왔다.
중환자실에서의 고통은 죽음과는 또 다른 결이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목마름이었다.
시간 감각은 사라졌고, 사지가 묶인 채 물 한 모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영혼까지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생수 한 병을 찾는 나의 모습은
직시하기 처참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내 승용차 트렁크에 ‘혐오의 상자’를 싣고 다녔다.
트렁크 밖으로 길게 삐져나온 나무상자, 그것은 관이었다.
사람들에게 원성을 살까 봐 병원주차장에도, 아파트에도
차를 세우지 못해 헤매고 다녔다.
9.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중환자실 간호사였다.
식당 밖에서 쓰러진 뒤 열흘이 흘러 있었다.
대동맥 파열. 조금만 늦었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현실과 섬망의 경계에서 내 손발은 침대에 묶여 있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를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죽음보다 잔인했다.
그 좁은 사막에서 며칠을 더 머물고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나는 가족들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내 차 트렁크에 실린 관을 제발 치워달라고.
섬망 속에서도 남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본성만은 끝내 남아 있었다.
10. 회생의 이유
지금 나는 회복이라는 긴 터널 한가운데에 서 있다.
한때 묶여 있던 손발이 풀리고, 내 의지로 펜을 들어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전과 다르게 보인다.
내 인생이 늘 평탄할 것이라는 믿음은 사라졌다. 대신,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던 나를 다시 살려 두신 이유가
분명히 남아 있음을 느낀다.
우리가 무심히 통과하는 ‘오늘’은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기도 끝에
되돌려 받은 ‘내일’ 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늘이었음을, 이 글이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