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는 평생을 절여온 달큼한 포도 향이
배어 있다.
유년 시절부터 코끝에 머물던 그 향기는
내 인생의 자부심이었고,
포도는 내게 작물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그러나 2025년 늦가을, 포도 산지인
우리 마을의 공기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다.
수확하지 못한 열매 앞에서 흘러나오는
농민들의 한숨만이
차갑게 들러붙어 있을 뿐이다.
농민들은 언제부턴가 ‘수익’이라는
신기루를 좇기 시작했다.
벼를 심던 논 위에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포도를 꽂았다.
캠밸의 소박한 단맛이 익숙해질 즈음,
‘귀족 포도’라 불리는 샤인머스켓이 등장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였던 그 품종의
배를 가른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고집과 무지였다.
현장에서는 수없이 같은 말이 반복됐다.
“송이를 줄여야 합니다. 그래야 당도가 오릅니다.”
나 역시 이 밭 저 밭을 뛰어다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침묵이었다.
농민들은 매뉴얼을 비웃듯 오래된 방식에 매달렸다.
그 결과 손에 쥔 것은 700g의 상품이 아니라
1kg을 훌쩍 넘긴 비대한 괴물들이었다.
몸집만 키운 포도는 태생부터 부실했다.
햇살을 나누어 받지 못한 알맹이들은
약속된 18 브릭스에 끝내 닿지 못했다.
그러나 추석 대목 앞에서 양심은 쉽게 무너졌다.
미숙한 포도들은 귀족의 탈을 쓰고 시장에 쏟아졌고,
소비자는 한 번 속은 뒤 등을 돌렸다.
새콤달콤한 캠밸포도는 포도상자를 열기 전부터
그 향기가 사람을 행복하게 했지만,
당도만 높은 샤인머스켓은 먹고 나면 입안에
여운이 조금 남는 정도이다.
인간이나 과일이나 외면이란 곧 슬픔으로
변하는 것,
귀족은 그렇게 겨울 문턱까지
팔리지 못한 신세가 되었다.
11월 하순, 서리가 내린 포도밭을 바라본다.
가지마다 매달린 커다란 포도송이는
이제 수확의 기쁨이 아니라 빚의 훈장이다.
정상을 벗어난 그 포도들의 종착지는
시장이 아니라 퇴비장이다.
이른 봄부터 진땀을 흘리며 자식처럼 키워왔는데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은 이 물건은
이제 과일이 아니라 부산물로 변해버렸다.
비료값과 외국인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한
농부에겐 부채만이 낙엽처럼 쌓여간다.
이 비극은 누구의 탓인가.
신품종의 생리조차 배우려 하지 않았던 무지,
‘크기만 키우면 된다’는 고집이 함께 만들어낸
결말이다.
나 또한 그 유혹에 흔들려 샤인머스켓을 심었으니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십 년간 우리를 먹여 살린 전통품종을 버리고
요행을 바랐던 대가는 시리고도 매섭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천천히 잘해오던 것을 버리고
빨리 가는 길을 택한 적이 있다.
그때 잃은 것은 돈보다 먼저
스스로에 대한 신뢰였다는 걸
이 늦가을에야 알게 되었다
수확기를 놓친 포도들이
시퍼런 봉지에 싸인 채, 가지에 그대로
매달려있다.
싱싱하던 잎은 낙엽이 되어 바닥에 뒹구는데
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매달려있는
저 녀석들은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모습 어디에도 귀족의 흔적은 없다.
그것을 잘라내야 하는 농부의 손끝에는
땅에 떨어져 부서지는 포도알만큼이나
짙은 눈물이 배어 있을 것이다.
이 계절은 너무 이르게 찬바람이 불어왔다.
농사는 결코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의
노리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배운다.
캠밸이 익어가던 시절,
마을을 채우던 그 달콤한 향기는
외래 품종의 화려함 속에서 끝내
되살아나지 않았다.
이제 마음을 비울 차례다.
이제 내가 배신했던 캠밸포도를
다시 찾는다.
그 소박한 향기로
다시 한번 내 가슴을 채워달라
조심스레 부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