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찾아서

by 포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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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은 본래‘자작바위’라 불리던 옛 지명이 세월을 지나면서

‘판암동’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천 년의 역사가 숨 쉬는 이곳에는

유명한 식장산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성재산이 우뚝 서 있다.

산 아래 자리한 마을이름은 성재, 성이 있다 하여 그렇게 불려졌다.


이곳은 전쟁 때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가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았던 산성이 정상에 있고,

남과 북을 잇는 협곡을 지키던 자리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와 국도, 고속도로가 이곳을 지난다.

‘삼정동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이제 터만 남아

천년의 이야기를 묵묵히 품고 있다.

나는 바로 이 두 산의 품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성터에 올라 무너진 돌 사이를 거닐다 보면, 오래전 이곳에 쓰러져간

영혼들의 메아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하다.

성터주위에 피어난 할미꽃은 묘비처럼 애잔하고, 붉게 물든 철쭉은

흘린 피의 흔적을 닮았다.

봄마다 온 산을 덮는 싸리 꽃향기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기억을 떠올린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바위 앞에 걸음을 멈추는 것은 그 속에

내 유년의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원형 그대로 남은 커다란 돌들이 있다.

나는 늘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로 묻곤 했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저 무거운 돌을 옮겨 왔을까?’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다. 주위를 둘러보면

녹슨 탄피가 눈에 들어온다. 미군과 인민군이 쓰던 것들이다.

손에 쥔 탄피는 가벼웠으나, 그 속에 담긴 세월의 무게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아마 이 총알은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갔을 것이다.

총성은 사라지고 연기는 걷혔지만, 나는 여전히 피 흘림의 자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성터의 역사를 더듬다 보면 삼국시대의 전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했던 길목,

바로 이곳이었다.

서해안에는 당나라군이 몰려오고, 신라의 공격으로 추풍령이 무너진 뒤,

이곳마저 뚫리자 백제군은 황산벌까지 밀려나고,

계백 장군과 장병들은 끝내 장렬히 전사했다.

천년이 훌쩍 지난 일이건만, 무너진 바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화살이 날아들고 창과 칼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 속에서

되살아나는 듯하다.


그러나 이곳의 이야기는 삼국시대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에도

이곳은 치열한 격전지였다. 어린 나에게 이곳은 단지 놀이터였으나,

사실은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간 자리였다.

천 년 전이었다면, 나는 백제 병사였을 것이고, 6·25 전쟁 때였다면

총을 들고 인민군과 맞섰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내 조상들의 피와 생명 속에

이미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에 닿게 된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앉았던 작은 바위에 몸을 기대어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할미꽃의 모습에서,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얼굴을 찾으려 한다.

성터 입구에 제17호라 적힌 낡은 기념비 하나가 이곳이 성터였음을 알리지만,

그 기념비 하나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진달래꽃을 따 먹으며 숨바꼭질하던 기억,

토끼 바위, 여우 바위, 투구 바위….

어린 시절 그렇게 크고 웅장하던 바위들이 어쩌다 이렇게 작아졌을까.

내가 자란 탓인지, 세월이 바위를 작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때의 순수했던 기억만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산 아래 포도밭 한가운데 작은 교회와 종탑이 보인다. 새벽마다 울려 퍼지던

종소리는 전쟁의 상처를 위로하며 새로운 소망을 심어 주었다.

5월이면 교회 사람들은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싸리 꽃향기 속에서

찬송가를 불렀고, 예배가 끝나면 돗자리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아이들은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며 웃음꽃을 피웠다. 지금은 그 모습이 사라졌지만,

노랫소리와 꽃향기는 여전히 바람 속에 살아 있는 듯하다.


나는 지금 성터 한가운데 서 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성루가 있었고,

장수와 병사들이 머물렀을 것이다. 무너진 돌들은 세월 속에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그 옛날에도 싸리 꽃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지친 병사들에게

향기를 선물했을 것이다.


오늘도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맑다.

꽃향기 속에는 백제의 함성, 신라의 외침, 전쟁의 포성,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겹겹이 울려온다.


이제 나는 안다. 이곳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다.

이곳은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함께 머무는 자리다.

나는 그 안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