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나를 깨우는 것은 새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쌀독 바닥을 긁는 서걱거리는 소리였다.
어제도, 오늘도 바닥이 드러난 쌀독을 긁는 그 소리는
우리의 가난을 알리는 아침의 교향곡이었다.
어떻게 마련했는지 모를 밥상이 놓였지만,
어머니는 끝내 부엌에서 들어오지 않으셨다.
문틈으로 엿본 부뚜막에는 허연 김이 오르는 숭늉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것을 마시고 계셨다.
정작 당신은 아침을 못 드셨으면서도 미소를 지으셨고,
오히려 도시락을 싸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셨다.
우리가 학교에 가는 모습을 봐줄 새도 없이
허겁지겁 품팔이를 나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
등굣길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친구들의 눈을 피해 수도 가로 달려갔다.
목이 터져라 물을 들이켜며 뱃속을 속여야 했다.
물을 마시고 병아리처럼 하늘을 봐야 했다. 그래야 많이 마실 수 있었다.
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그 허기진 눈에는 길가의 잡초가 김치처럼 보였고, 냇가의 모래는 쌀알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없음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와 찬장을 열어보고
솥단지를 뒤져보아도 입에 넣을 것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쌀독을 열어보지만,
오늘도 어제처럼 한숨만 채워 넣고 말았다.
저녁 늦게 돌아오시는 아버지는 늘 빈손이셨다. 그러니 쌀독이 채워질 리가 없었다.
기억이 시작된 그날, 눈을 떠보니 허름한 농가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집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였다.
아버지는 소작농이었고, 어머니는 품팔이를 나가셨다.
점심때가 돼도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혹독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침 한 끼.
밀가루가 준비된 날에는 저녁에 수제비를 먹을 수 있었다.
바가지에 어머니가 밥을 비벼 놓으면, 수저를 들고 있던 우리 형제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어머니는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아버지는 늘 포도밭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셨다.
밭 끝자락에 붙은 농막 같은 집을 빌려 사는 대가로
일 년 내내 보수 없는 포도밭 일을 하셨다.
수확 철이 되면 밭주인은 묶음 돈을 세며 웃었고,
더 많은 수확을 내지 못하면 내년엔 경작자를 바꾸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죽도록 일한 아버지는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고,
포장하다 떨어진 포도 알을 얻어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모습은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일 년 내내 고생하고도 품삯조차 받지 못하고 떨어진 포도 알이
그 대가였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반드시 내 포도밭을 만들겠다.’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하지만 서글픈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이면 포도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 달콤한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할 때,
포도밭을 뛰어다니며 가슴 가득 향기를 채울 수 있었다.
시골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온 아버지는
텃세가 심한 이 동네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집 저 집 잔심부름까지 하셨다.
그뿐 아니라 정전이 되어 마을의 전깃불이 꺼지면
제일 먼저 전봇대에 올라가셨다.
전기에 대한 상식도 없으면서 그 위험한 일을 감수한 것은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린 마음에도 텃세를 부리는 동네 어른들이 미웠고,
그들 앞에서 굽실대는 아버지가 바보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봇대에 올라가신 아버지가 감전돼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크게 다친 아버지는 포도밭 일도 할 수 없었고,
빌려 쓰던 집도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
더 심한 가난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아침 밥상은 사라졌고
대신 수제비가 등장했다.
방학 때의 일이다.
시내에 땅콩 까는 일이 생겼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몰려갔다.
오늘은 점심도 얻어먹고 잘하면 일당도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 속에
아침부터 열심히 땅콩을 깠다.
그런데 점심때가 다 되어 주인이 나타났다.
“야! 너 일어나 봐. 어디서 이런 쪼그만 녀석이 왔어!”
“당장 꺼져!”
손에 쥐고 있던 땅콩을 내려놓으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오전 내내 헛수고한 것이 분했고, 땅콩 한주먹 못 가져온 것을 후회했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마을이 가난했기에 친구들도 허기에 시달렸다.
그 애들이 나를 부르면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다.
본능처럼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시절, 책상 위의 공부보다 절박했던 건 ‘먹는 일’이었다.
포도밭 울타리에 심겨있는 돼지감자는 봄이 올 때까지
간식이 아닌 우리들이 먹는 저녁밥이었다.
덜 익은 감나무 밑에서 벌레 먹어 떨어진 감을 주워 먹던 날.
떫은맛에 모래를 씹는 듯했지만, 뱃속이 채워지는 기쁨이 있었다.
애들은 어디에 가면 먹을 것이 있는지 서로 정보를 나누는 것이
항상 대화의 주제였다.
겨울을 버티게 했던 고구마가 바닥나면 우리는 밀가루로 연명했다.
하지가 지나면 땅이 있는 집들은 감자를 캐고 보리를 베지만,
우리 집엔 논밭이 없어 타작할 보리도, 캐 먹을 감자도 없었다.
부잣집이 타작한 곡식을 창고에 들이는 모습을 보다 보면,
학교를 그만두고 머슴이 되어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아이를 써줄 리 없음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동네 할아버지가
산에 가면 어떤 풀을 뜯어먹어야 하는지 알려주시면서,
쑥을 비롯한 봄나물은 반드시 데쳐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하얀 속껍질을 으깨서 먹으면
밥 한 공기 먹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 주셨다.
할아버지는 묻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아무것도 못 먹고 사흘을 굶으면
몸이 붓고, 일주일을 굶으면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때면 친구들과 떼를 지어 남의 밀밭으로 달려가
이삭을 비벼 입에 넣고 껌처럼 씹었다.
곡물의 단맛이 침에 섞여 목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이 이 계절의 유일한 점심이었다.
우리 동네 부잣집인 큰 대문집의 감자 캐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친구들과 감자밭을 일구다시피 하여 이삭을 줍다가 주먹만 한 감자를 발견하면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바가지를 못 채웠으나 몇 개를 주웠으니, 적어도 한 끼는
해결된 셈이었다. 뱃속이든 주머니든 뭔가를 채워 집에 갈 때는 마음이 든든했다.
그 작은 기쁨 때문일까, 그날따라 하늘이 유난히 파랗게 보였다.
밤꽃 피는 계절이 오면 골목마다 밀가루 반죽 냄새 같은 밤꽃 향이 번졌다.
그 향은 부엌에서 반죽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때 마당엔 먹을 수 없는 향기만 감돌았다. 일 년에 한철, 그 꽃의
긴 수술에서 뿜어내는 향기는 배고픔의 냄새였을 뿐이었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은 개구리를 잡는 날이었다.
아카시아나무로 회초리를 만들어 개구리를 잡아 다리를 삶아 먹었다.
그 맛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빈속을 채우는 게 목적이었다.
개울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시꺼멓게 그을린 냄비를 올려놓으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고기 삶아지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어느 날의 기억은 선명하다.
혼자 논둑에 나갔다가 살이 통통하게 오른 녀석을 발견하고
회초리를 내리쳤을 때, 그 녀석은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나는 회초리를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살기 위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 죄책감과 함께, 떨며 죽어가는 그 눈빛이 밤새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배고픔 그 너머에서 몰려오는 묵직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다시는 개구리를 잡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한 시간 앞둔 3교시가 끝나자, 옆자리 친구가 도시락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집은 부잣집이었기에 불고기를 싸 왔다며 자랑스럽게 먹었다.
안 보는 척했지만 내 눈은 그 젓가락질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볼 수 없던 쌀밥과 고기, 눈과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연신 목에
침이 넘어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그 친구가 놓쳐버린 한 점의 고기였다.
그 녀석이 자리를 뜨길 기다렸다가 교실 바닥에 떨어진 고기를 얼른 집어 먹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불고기. 먼지가 묻었거나 말거나 그 맛은 황홀했다.
씹지 않고 맛을 계속 느끼고 싶었지만, 어느새 녹아 없어져 버렸다.
마당 한쪽엔 돼지우리가 있었다.
잔반을 맛있게 먹어대는 돼지를 보며, 나와 다를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흘에 한 번, 형들이 시내의 식당을 돌며 얻어오는 잔반이 먹이였다.
먹이가 부족해 꽥꽥 소리를 지르며 더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돼지.
나는 망태를 메고 들로 나가 돼지가 잘 먹는 풀을 베어 던져주었다.
원래 등겨나 잔반을 먹는 돼지도, 지금의 나처럼 먹이가 부족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 내가 뜯어다 준 풀을 거침없이 먹어댔다.
밀린 수업료를 내기 위해서는 저 돼지가 빨리 커야만 했다.
굶주림은 단순한 허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엊그제는 아랫마을 사진사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다.
시내 변두리 빈민촌에서 카메라 하나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굶어서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학교 가는 길, 채소밭이 많이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굶어 죽어 고랑에 쓰러져있는 시체의 모습이 가끔 눈에 띄었다.
어제저녁에 죽었는지 배춧잎에 내린 서리가 죽은 사람의 옷자락에도
수염에도 하얗게 붙어있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누구나 견디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면 저 꼴이 되는 것이라는 슬픈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내가 살아갈 앞날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배고픔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밥은 못 먹더라도 밀가루라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을이 오면 산은 풍성한 보물창고가 되었다.
도토리, 밤, 돌배가 있었고, 운이 좋은 날에는 머루도 따 먹을 수 있었다.
온 산의 열매가 다 내 것이었다. 산을 누비며 이것저것을 먹다 보니
입가에 묻은 시꺼먼 열매즙 자국을 보며 우리는 서로 웃었다.
밤 가시에 찔리면서도 어머니께 드릴 알밤을 주머니마다 채웠다.
내 노력으로 어머니께 뭔가 드릴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누렇게 익은 벌판을 바라보면, 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뿌듯했다.
논둑길을 걸으며 벼 이삭을 쓰다듬었다.
여기저기 날뛰는 메뚜기를 보며 오후에 메뚜기를 잡을 계획을 세웠다.
벼 이삭을 만지다 보면 손가락에 느껴지는 볏 알의 감촉만으로도
마치 따뜻한 쌀밥을 만지는 듯했다.
어느 날, 매달 1달러를 보내주는 미국 후원자에게 보낼 가족사진을 찍었다.
처마 밑에 나란히 선 우리 가족의 핏기 없는 얼굴에는 배고픈 표정이 역력했다.
미국 후원자가 이 사진을 본다면 아마도 전쟁 중의 피난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보내는 편지 첫머리의 한 줄,
“사랑하는 아들아.”
그 한마디는 굶주린 내 영혼을 채우는 빵이었다.
생일이면 작은 용돈을 보내주셨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그 따뜻한 부름이었다.
나는 늘 답장에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라고 썼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기억하지 말고, 힘이 되면 어려운 네 이웃을 도우라.”
그분은 내 마음속에 만 석 지기 삶을 살도록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다.
세월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그분의 사진을 지니고 다닌다.
이제 밤꽃 향기를 맡을 때마다, 그것은 더 이상 배고픔의 냄새가 아니다.
그것은 따뜻한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사랑의 향기다.
가난은 내게 오래도록 배고픔의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 기억 속에는 어머니의 희생과 후원자의 가르침이 있었다.
어머니의 쌀 긁는 소리, 텅 비어 있던 쌀독의 모습.
그 추억은 이제 슬픔이 아니라 삶을 버티게 해주는 용기와 격려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허기로 인해 작은 것에도 만족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나 자신과 약속했던 포도농사를 하고 있다.
죽어라 일해주고 품삯도 받지 못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옛날처럼 굶어서 고통당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향해 내 마음이 쓰이는 것은 그 옛날의
아픔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포도향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감나무아래 덜 익어 떨어진 열매를 보는 느낌도
변함이 없지만, 배고프지 않기 때문에 쓴웃음으로 지나치고 있다.
불고기를 먹을 때도 주워 먹은 기억이 떠올라 혼자 웃는다.
내가 죽인 개구리 때문일까, 지금도 개구리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어
짠하기만 하다.
배고픔의 시대는 벌써 지났다. 그런데 배부름에 대한 감사가 점점 흐려져 가는
모습이 부끄럽다. 올해 추수감사절에는 더 뜨거운 감사로 내게 주신 열매를
나누어야겠다. 그것은 후원자가 남겨준 말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