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스마트폰이 비명처럼 울린다.
정체 모를 유튜브 링크, 조악한 배경 위에 얹힌
‘인생 깨달음’.
보낸 이는 한때 똑똑하다고 불리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세상에 전파해야 할
의무라도 진 듯 타인의 잠을 침범한다.
그것은 공유가 아니다. 침입이다.
젊은 시절 그들은 분석했고, 기다렸고, 검증했다.
지금은 다르다.
‘좋아요’ 숫자를 진리의 증거로 삼고,
‘전송’ 버튼을 사유의 종착지로 여긴다.
생각은 사라지고, 확신만 남았다.
확신은 언제나 무례하다.
추함은 갑자기 늙지 않는다.
권력을 오래 쥐어본 손에서부터 시작된다.
병원 대기실에서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외치는 노인.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래서 묻는다.
이미 반납했어야 할 직함을 방패처럼 휘두르며
현재의 빈자리를 가린다.
존중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크지만
존중받을 이유는 스스로 지워버렸다.
지하철에서 최대 음량으로 울리는 트로트.
한 소절이 끝나도록 휴대폰을 찾지 않는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타인의 불편을 감각하지 못하는 상태.
그것은 노화가 아니라 방종이다.
평생 결정을 내리던 사람들은
은퇴 후에도 판결을 멈추지 못한다.
모임에서, 가정에서, 식탁 위에서
기어이 마지막 말을 차지해야 직성이 풀린다.
“네가 뭘 안다고.”
그 한마디는 상대의 입을 닫게 하고
자신의 고립을 완성한다.
그들은 여전히 말이 많다.
그러나 대화는 없다.
대화는 듣는 자의 능력인데,
듣는 법은 퇴직과 함께 반납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번호부를 정리한다.
지워지는 도움 요청도,
지워지는 추억도 없다.
지워지는 것은 반복되는 무례다.
삭제 버튼을 누를 때마다
관계의 사망신고서를 쓰는 기분이지만
이미 숨이 멎은 관계를 억지로 붙들 이유는 없다.
요즘 자주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메이와꾸’.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품격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타인의 시간을 침범하지 않는 최소한의 절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지혜를 축적했다고 믿는 순간
자기 검열을 중단한다.
그때부터 지혜는 썩기 시작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지혜는
더 이상 조언이 아니다.
강요이고, 소음이고, 폭력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많이 말할 자격을 얻는 일이 아니라
덜 말해야 할 책임이 늘어나는 일이다.
확신을 줄이고, 질문을 늘리고,
과거의 직함 대신 현재의 태도로 증명하는 것.
새벽 메시지를 지우며
나는 스스로를 점검한다.
혹시 나 역시
내 생각을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누군가의 고요를 침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곱게 늙는다는 것은
조용해지는 것이다.
마지막 말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