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by 포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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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석 자를 잊기로 했다.

세상이 나를 부르는 이름 대신,

나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한자로 ‘허물 죄(罪)’.

마음 같아서는 ‘죄인(罪人)’이라 온전히 적고 싶었으나,

서류의 작은 칸에 담기엔 그 획이

너무 무겁고 번잡했다.

그래서 줄이고 줄여 오직 ‘죄’ 한 글자만 남겼다.


사건은 아주 사소한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납품 가격을 후려치던 그날,

나의 이익은 누군가의 피해로 이어졌다.

나의 실적이 늘어날 때, 그 사람의 판매량은 줄었다.

피해자와 마주친 적이 있다.


“가격 갖고 장난을 쳤냐?”

그가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아니라고 했다.

그의 표정이 잠시 멈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그날 이후로

그의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화살처럼 남아

잊을 만하면 내 안을 파고들었다.

뒤늦게 그를 찾아 나섰을 때,

그는 이미 안개처럼 사라진 뒤였다.


사죄할 대상도, 용서를 빌 기회도 잃어버렸다.

성경 속 삭개오는

부당하게 얻은 것의 네 배를 갚겠다며 내려왔다.

하지만 나는 내려갈 나무조차 없다.

돌려줄 사람이 없다.

갚을 수 없는 빚만 남았다.


그날 이후, 나는 모든 서류와 계약서 위에

내 이름 대신 ‘죄’를 쓴다.

사람들은 그저 흘림체로 쓴, 독특한 서명이라 여기고

무심히 지나친다.

하지만 나는 안다.

펜촉이 종이를 긁으며 ‘죄’를 남길 때마다,

그것은 서명이 아니라

내 영혼에 남는 낙인이다.


수만 번을 반복하는 동안

손가락은 그 굴곡을 먼저 기억하고

마음은 뒤따라온다.

아침마다 거울을 닦는다.

닦으면 닦을수록 얼굴은 맑아지는데,

그 너머의 기억은 더 또렷해진다.

세상이 정한 공소시효는 지났을지 몰라도,

내 양심의 시계는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 내 본명을 묻는다면

이제는 주저 없이 답하리라.

나의 이름은 ‘죄’라고.

언젠가 양심의 법정에 서게 된다 해도,

종이 위에 남겨진 이 글자는

끝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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