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에서 들은 영어

by 포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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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류행사에서 만난 일본인 여성이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우리 지역에 머물며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공부하는 이였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그와 함께 재래시장 등을 돌며

실생활에서 쓰이는 한국어를 가르쳐주곤 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백제의 숨결을 소개하기 위해 공주 공산성으로 향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시간의 여유가 있어 계룡산을 끼고도는

한적한 우회도로로 차를 몰았다.


갑사를 지나 한참을 달렸을 때,

길가에서 한 여성이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남루한 옷차림에 헝클어진 머리,

행려자였다.


창문을 내리자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Can you give me a ride up to that village?”

“ちょっと, 乗せていただけませんか.”


나와 일본인 여성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외양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음이었다.


그를 태우자마자

그는 일본인 여성을 향해

막힘없는 일본어로 말을 이었다.

또박또박,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었다.


일본인 여성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Would you like to come over for some coffee?”

“コーヒー, いかがですか.”


묘한 이끌림에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머무는 곳은

동네 어귀의 다 쓰러져가는 폐가였다.

빛바랜 흙벽과 낡은 창호문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자

그는 오래된 잔에 믹스커피를 내왔다.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냄새는 눅눅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우리는 잔을 들고만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대기업,

그리고 어느 순간 멈춰버린 시간.


잠시 말을 고르던 그는 덧붙였다.


“맞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의 앞에는

관공서에 내밀 호소문 두 장이 놓여 있었다.


종이는 구겨져 있었지만

글씨는 단정했다.


삶은 이미 기울어 있었는데

그 글씨만은 비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커피를 끝내 마시지 못한 채

그곳을 나섰다.


차 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가 문설주에 기대어 섰다.

허리를 곧게 편 채

우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Have a nice day.”

“それでは, また.”


그 한마디가

방금 지나온 폐가를

잠시 다른 세계처럼 보이게 했다.


차가 움직이고

백미러 속에서 그가 점점 작아졌다.


자세는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유창한 작별 인사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집.


그리고

끝내 내려놓지 못한 한 사람의 자세만이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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