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서면 얼굴이 빨개지는 ‘적면공포증’을 앓고 있어 짝사랑중인 남자에게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 질병을 고치고 싶다며 한 철학자를 찾아왔다. 철학자는 그 질병을 고쳐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면 소녀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불만을 적면공포증 탓으로 돌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철학자는 소녀가 그저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 일단 나아갈 수 있는 용기만 북돋워 주었다. 소녀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남자와 친해지고 고백도 받았다. 그 뒤로 그녀는 더 이상 철학자를 찾아오지 않았고 적면공포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철학자는 아마도 더이상 그 소녀에게 적면공포증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움받을 용기1의 도입부에서 아들러의 목적론을 설명하는 인상깊은 사례다. 나는 크고 작은 적면공포증이 있다.
[1단계] 6시 알람을 맞춰놓고 출근 전 잘 수 있을만큼 잔다.
왜냐면 1시간이라도 더 자야 회사에서 덜 피곤할 테니까. 지금 일어나서 땅크부부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을 챙겨먹으면 잠깐은 가뿐하겠지만 이따 오후에 엄청 졸릴걸.
[2단계] 책을 매일 얼만큼 읽어야지 하고 한참만에 몰아서 보거나 그냥 덮는다.
왜냐면 매일 조금씩 보면 앞의 내용을 잊으니까 다시 찾아봐야하는 비효율이 있잖아. 컨디션 좋을 때 몰아서 보는게 좋아. 그리고 지금은 피곤하니까 내일 컨디션 회복을 위해선 그냥 자야지.(그리고선 유튜브 쇼츠를 보다 늦게 잔다.)
[3단계] 운전면허를 따지 않는다.
필요한 거 알아 잔소리도 수두룩하게 들었어. 내년에 관외로 회사 발령이 나면 필요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도 안다구. 근데 난 심각한 기계치에 길치라서 운전하면 보험료 엄청 오를거야. 공간 감각이 떨어져서 여기저기 매일 부딪힐걸. 걸어다니면서도 잘 부딪히는데 운전을 하겠어?
[4단계] (비밀이다) 임신과 출산 고민이 길어진다.
지나다니는 아이들 참 예뻐. 조카들은 말할 것도 없지. 맞벌이지만 친정부모님께서 한번씩 도와주신다는 고마운 말씀도 하셔. 근데 말야.. 난 하루에 혼자 뭘 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잖아. 사람 많고 기빨리는거 아주 싫어하고. 워킹맘의 멀티태스킹 정말 쉽지 않아. 깜냥이 될까.
1단계 적면공포증은 난이도 하, 2단계는 중하, 3단계는 중 4단계는 상이다. 1단계는 매일은 못해도 주기적으로 15분~20분씩이나마 일찍 일어나 증상을 완화시키고 있다. 왜냐면 실제로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저 모닝루틴을 하고 출근했는데 생각만큼 피곤하지 않았으니까 적면공포증의 실체를 직면한 셈이다.
2단계도 간간히 완화시키고 있다. 미움받을 용기는 한 3년 전에 처음 구입했는데 괜히 답답할 때마다 또 꺼내읽는다. 출출할 때 냉동실에 얼려둔 인절미 한 조각씩 꺼내먹듯이. 구석에 던져둔 자기개발서 세이노의 가르침도 요즘 주기적으로 꺼내 보는데 날카로운 팩트 폭행에 눈이 어질어질하다. 그렇게 조금씩 읽더라도 결국 읽고 나서 비효율적이네 어떻네 하며 후회한 날은 없었다. 짧게 읽은 날도 그 안에 돌아볼 내용은 항상 있었다. 2단계 적면공포증도 어느정도 파악한 셈이다.
3단계와 4단계는 넘어서지 못했다. 운전과 임신·출산·육아는 내 인생의 제대로된 적면공포증이다. 사실 깨고 싶은 마음이 진정 있는지도 조금 의심이 된다. 어쩌면 자주보는 ‘한블리’프로그램 때문에 운전에 대한 겁만 더 많아졌는지 모르겠다. 또 아이를 키우기에 각박해진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으며 내가 과연 육아가 가능할까 늘 생각한다. 하지만 언젠가 SUV를 운전하며 뒷자석 카시트에 아이를 태우고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상상도 해본다. 아이들과 도란도란 수다떨면서. 출산과 동시에 찾아오는 정신·신체적인 고통과 경제적인 압박. 그 이상의 행복을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찰나에 정말 느낄 수 있을까. 그런 삶은 어떨까. 지금 부족한 한가지 퍼즐이 정말 아이로 채워질 수 있을까.
언젠가는 3단계와 4단계 적면공포증도 해소할 수 있는 날이 올 지 모르겠다. 골방 철학자는 내게 뭐라 말할까. ‘혹시나 사고를 낼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넌 그저 운전을 하지 않는 쪽으로 편한 선택을 해 버린 거야. 정말로 네가 길치이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운전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남들만큼 그 수준의 육아를 해내지 못할 것이 너무 두려워서 넌 그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편한 선택을 해 버린 거야. 실제로 네가 일과 육아 멀티 태스킹을 못하거나 아이를 키울 자질이 부족해서 육아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넌 아직도 적면공포증이 필요하구나. 네가 그 병을 필요로 하는 이상 누구도 널 치료해줄 수 없단다.’
섭섭하게도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