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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현 Jun 21. 2024

오해의 속도

 꺼내기 부끄러운 사소한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사무실에는 작은 정수기가 있다. 어느 정도 물을 뜨고 나면 뜨거운 물이나 차가운 물이 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나는 아침에 물을 한 잔 뜨는데 350ml 컵의 반이나 2/3 정도 뜬다. 물을 천천히 마시기 때문에 중간에 다시 물을 받는 게 좋기 때문이다. 그날도 더운 여름이었고 나는 아침에 사무실 문을 열고 탕비실에 가 컵에 따뜻한 물 조금, 차가운 물을 1/2 정도 담았다.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아침마다 정수기 물을 뜨러 거의 매일 사무실에 오시는 가까운 직원분을 만났다. 그분은 탕비실로 들어오시더니 “왜 가방을 메고 있어요?”라고 물어보셨고 나는 별 뜻 없이 “아~ 그냥 좀 더워서 가방 안 놓고 바로 정수기로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대답과 동시에 보이는 그분의 표정에서 알았다. 그분은 내가 누가 손대지 않은 정수기의 차가운 물을 먹기 위해 아무도 오기 전에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재빠르게 물부터 뜨러 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사실 별다른 생각과 계산이 없었던 나는 그 질문과 웃음에 슬쩍 의아했다.     




 내가 아침부터 컵에 찬물을 한가득 담아가는 것으로 그분이 보았다면 더운 날씨에 뒷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괜한 오해를 살 필요 없으니 내가 시간대를 좀 나눠서 조금씩 정수기를 이용하면 되는 일이다. 오해를 일으킨 사람도 그 ‘의도 없음’으로 모든 상황이 무마되는 것은 아니니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정수기 에피소드는 귀엽다. 그동안 지나온 크고 작은 오해들을 돌아보니 오해 그 자체보다 ‘오해에서 시작한 논스톱 표현’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오해에서 시작한 논스톱 표현’은 한번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붙는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 판단한 내용이 오해인지 사실인지 확인하기 전에 내 판단이 맞으리라 빠르게 확신한 후 그 오해한 마음이 곧바로 표정과 말로 드러날 때 그 마음은 상대에게 눈에 띄게 부각된다. 상대가 잘못된 행동을 반복해서 하는지 몇 번 지켜보기보다 지금 내 감정적 불편함이 먼저이기 때문에 성급히 드러나는 표정이나 말은 상대에게 날것의 상태로 전달된다. 내가 혹시 잘 못 알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한 번 배제하면 다음 단계는 쉽다. 그냥 상대방이 실수한 것이다. 오해의 속도가 빠르다.   

  

 나야말로 다른 이에게 오해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감정을 여과 없이 전달한 경험들이 꽤 떠오른다. 업무 중엔 메시지로 자주 소통하기 때문에 특히 변수가 많다. 사소한 말투나 행동 하나에서 시작된 오해가 얼마간 상대에 대한 감정을 밝지 않게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정말 실수했을 수도 있고, 혹시 내가 그를 오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해버리지 않는 것, 일상이 늘 바쁘게 돌아가지만 때로는 어떤 상황에 대한 실시간 논스톱 인식보다 투스톱 인식 정도 해 보는 것그래서 설령 오해가 발생하더라도 그 오해의 속도를 조금 더디게 해 보는 것그런 연습이 한 번씩은 필요한 듯하다.


 사람에 대한 편견은 나이가 들수록 하나둘 생기고 이미 생긴 편견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 10년 후 유명한 편견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상 속 오해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투스톱 인식 연습은 사실 지금부터 꽤 필요한 연습인 것 같다.     


① 가까운 누군가를 쉽게 오해하고 싶을 때, 오해한 속내를 곧바로 내비치고 싶을 때 투스톱 인식 해보기(그래도 짜증이 나면 그냥 짜증 낸다.)

② 피곤한 날 무심결에 나올 수 있는 오해 살만한 행동 조심하기

③ 아직 가깝지 않은 이에게는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한 예의, 이미 가까워진 이에게는 의도치 않게 선을 넘거나 상처 주지 않기 위한 적당한 예의 지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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