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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Jan 29. 2024

메신저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밤에 문득 든 생각.


발단:

   자정이 훌쩍 넘은 오밤중 그는 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답장을 보낸다. 답장은 그가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간 전 그의 친구로부터 받았던 그쪽 편에서의 답장에 재차 응하는 것으로서, 당장의 시급한 용무와는 거리가 먼 다만 시시콜콜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의 전언을 발송된 지 채 몇 분이 안 되어서 자칫 실수로나 읽음 표시를 남기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본인의 핸드폰 잠금화면 위에서 문자 그대로 낱낱이 확인하고 그에 대한 최초의 감각적인 반응과 뒤이어 나름대로 숙고한 재치 있는 답변의 내용까지도 진즉 마련해 놓았지만 끊김 없이 대화를 지속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익숙한 태도로써 답장을 보내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을 함께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대화의 소재거리나 평소 오고 가는 "문자"들 사이의 간격,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의 생활 습관, 그리고 그의 상대방이 자신의 이전 얘기에 답을 하기까지 소요되었던 시간 등의 정량적이고 정성적인 요소들이 두루 고려되었다.

   물론 매번이 이와 같진 않았다. 부득이하게도 업무상의 상급자와 문답한다거나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그녀에게 은은하게 구애할 때라면 그도 상시 핸드폰을 움켜잡은 제 모습을 구태여 감추려 하진 않았다. 게다가 상기한 친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간혹 즉각적인 반응이 요구되는 상황에까지 곧바로 답장하기를 주저하진 않았다. 허나 실제로 그러한 마당에는 둘 중 하나가 답답함에 못 이겨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더 흔했고, 그도 아니라면 정말 중요한 얘기는 직접 만나서 하기로 해 약속한 날짜까지 미뤄두는 적도 많았다. 결국 그 친구와 사이에서만큼은 대부분의 경우에 수 시간의 간극을 둔 채로 느릿느릿 각자의 문자가 전송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제 가장 친한 친구를 너무도 편히 여긴 나머지 정작 그와의 대화에만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친구만은 한도 없이 대화를 죽 이어나갈 용의가 있는 유일한 인물이어서, 그 밖의 친구나 지인이라는 이들에게는 웬만해선 연락하는 일이 없었고 간혹 그들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하더라도 길게 끌 생각이 없어 무심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는 꼭 끝에다가 잘 지내라거나 다음에 보자는 둥 동그란 마침표를 붙이는 일을 빼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려 그가 서둘러 답장하지 않는 것은 자칫 부러질까 겁나는 그와의 연약한 대화의 단절을 초래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전개:

   그런 그가 어려움을 느끼는 건 다음날 제 친구와 만나 잔을 몇 회 기울이고 나서였다. 지난번의 만남 이후 어느 일자 재개된 메신저상 대화는 당일의 대면을 이유로 일단 종결되었고, 이는 이제까지의 반복되는 역사를 답습하듯 일정한 공백기를 가진 이후 난데없이 보내져 온 시답잖은 문자를 계기로써 다시금 발생할 것이었다. 하지만 수일이 지나도 문자는 도착하지 않는다. 제 편에서 물꼬를 틀 수도 있겠지만 간만의 재회 이후 찾아온 권태감에, 그리고 그에겐 생각 없이 툭 던질 말들의 결핍과 반드시 요구되는 바도 아닌데 구태여 그러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으로 말미암아 그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수일이 대신하는 시간의 지속은 나날이 길어져 새로운 삶의 패턴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자정을 지나치는 새로운 하루의 첫머리 그는 고요한 채팅 방을 열어둔 채 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 건넬 말을 고심한다. 그의 고민은 금세 방향을 틀어 그가 이전부터 갖고 있던 사상인 자신은 메신저를 이용한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이를 만한 사소한 이야깃거리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현 상황에 대한 불만감을 긍정적으로 승화한 것으로 실상 그에게는 조금도 생소한 일이 아니어서 이전에도 수 차례 비슷한 경험을 겪은 바 있고 그럴 때면 언제나 불만을 가지는 대상의 본질적인 한계나 적어도 자신과는 잘 맞지 않는 점을 가급적 정제된 말로써 지적하려 애썼던 것이다.


위기:

   하지만 오래된 생각일수록 그 속은 모호하고 공고한 껍데기 내부에는 아무것도 남아 없어 그것을 굳이 열어 제낀다면 마주할 허전함을 내용물로 다시 채워 넣어야 하는 법이다. 그는 막막함을 느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실마리를 찾아 딛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그 실마리란 것조차 아무렇지 않게 곧장 떠오르는 성질의 물건은 아니어서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공을 들여 모색할 필요가 있고 따라서 마찬가지의 전략으로 실마리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다시 그러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실마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무한한 연장의 프랙탈 사유가 불가피할까? 물론 그렇게 해서 성공할 리는 없으므로 다른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기보다 어딘가 끄적여보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물질적 구체성이 사유의 구체화로 이끌어주리라는 발상에 착안하여 초등학생 때나 했었던 브레인스토밍을 떠올리곤 손에 잡힐 종이나 펜을 찾아보지만 전자 기기에만 익숙한 현대인의 가정에 그런 게 널브러져 있을 리 만무하므로 아쉬운 대로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몇 가지 단어나 간혹 미완성된 문장을 적는 것으로 만족한다. 원한다면 방사형으로 뻗쳐 나가는 가지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귀찮다.

   약간의 수고를 뒤로하고 구체성의 연계라는 발상은 성공적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는 자신이 메신저-의사소통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돌려받았고 그에 관한 한 모든 기억과 사실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 순간 그에게서 빠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되돌아올 그것은 맨 처음 이와 같은 사색의 시발점이 되었던 동기였다.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으며 또 했어야 하는 일, 그러면서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쉬이 갈피를 잡지 못해 금방 눈길을 돌렸던 목표를 그는 면책성의 사유를 구실로 아직은 망각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를 가리려는 부가된 임무가 예상외의 속도로 매듭지어지면서 본래의 고뇌가 되살아나기까지는 오래 남지 않았다.


절정:

   문득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수행했던 행위와 앞으로 수행해야 할 그것, 그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문자 보내는 일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친구에게 전할 내용을 궁리하는 것은 그 또한 일종의 작문이 아닐까? 아무리 짧더라도, 제 아무리 적은 노력을 기하여도, 마치 대화하는 것과 같이 누군가는 자신과 달라 상대방의 문자에 백이면 백 즉각적으로 답변하고 일말의 회고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를 반사적으로 내뱉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종국엔 어디까지나 제 선택에 달린 문제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그리 할 수밖엔 없다는 강제성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아무리 사소해도, 볼일 없이 예사로운 용건을 다루는 때에라도, 그는 자기 말의 맥락상 적절함과 문법적 정확성을 의심하고 문장의 안팎으로 형식과 관계나 표현들이 어색하진 않은지를 매사 고민하며 따라서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몇 번이고 만족에 이르지 못할 퇴고를 거쳐야만 했다. 피곤한 일이다. 긴 글을 쓸 때처럼, 그가 메신저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그 과정이 유발하는 본질적인 피로감에 있었다. 아마도

   까마득한 고대에 문자와 글의 발명은 인간의 언어를 전혀 다른 두 양상으로 결정적으로 분단시켰다. 그 빈도에 있어서 언제나 후자에 앞서 왔고 따라서 인류의 언어생활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한사코 놓지 않은 소리 - '말'과, 탄생한 이래 줄곧 승승가도를 달렸으며 비길 데 없는 특출남으로 특히나 오늘날 제 영향력을 나날이 확대하는 표식 - '글'의 대립. 그런데 현대의 상황은 이전부터 전자의 영지를, 곧 권위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려던 후자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코 관철에 이르지는 못했던 그 꿈을 예기치 못한 기술의 발화가 이루어지게끔 하는 것이다. 사람이 신체 밖으로 접촉하고 타고난 발성 기관을 사용하길 그치지 않는 한 음성이 설 자리는 완전히 소실되지 않겠지만, 차마 감지할 수 없는 속도로 전송되는 문자-메시지의 도래가 말로 된 대화를 글로 대체하고 말겠다는 옛 야망의 발현임이 틀림없다면 메신저는 말소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문자가 미처 구비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갖추기가 요원할 궁극적인 요소는 대화의 양자를 지금 이곳에 묶어두는 구속력이다. 문어는 말에게는 부재한 지속한다는 성질로써 빼앗길 리 없는 불변의 입지를 확보하였지만 그 보존력이 뜻하는 바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어서, 휘발하는 음성과 달리 글로 적어서는 읽고 쓰는 당사자들이 하나의 시공간 내 놓이기를 강제할 수 없고 서로 얼굴을 맞붙인 채 실시간의 대화만이 가져다주는 즉각적인 창발성의 스릴을 느낄 수가 없다. 상대방의 언어뿐만 아니라 이 다음 찰나의 순간에 나의 입에서 튀어나올 음성까지도 좀처럼 예기할 수 없는, 미리 계획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계획대론 되지 않는 사태의 긴박함이 여기엔 도려내져 있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혹자는 그것에 내재하는 은밀한 목표 : 진정한 말의 구축을 깨닫지 못하고 늦은 밤 현재까지도 무슨 답을 보낼지 결정하지 못한 채 흰 종이에 초안을 쓰는 것마냥 화면 위 빈칸에다 썼다가 지웠다만을 반복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문자의 정의상의 한계는 끝끝내 아직도 극복되지 못했다.


결말:

   어느덧 밤이 깊었으므로 그는 다음날의 기상 시간을 고려하여 더 이상의 작문을 단념한다. 발광하는 화면 위에다 그리고 그 앞엔 머릿속으로 이미 너무 많은 글을 적었기 때문에 심신은 회복을 필요로 한다고 그 자신은 판단했다. 어차피 급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당장 그의 면전에 친구의 부담스런 얼굴이 내비치는 것도 아니었고 - 만일 그랬더라면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그나 아니면 차라리 그의 친구 쪽에서 별 대수롭잖은 주제를 꺼내서 그는 빠져나오는 말들을 대강 흘려듣고 그러면서도 상대의 말하는 방식이나 소재에는 이미 충분히 익숙하므로 애쓰지 않고도 그 요지를 파악할 수 있어 맥락에 맞게 때로는 긍정적인, 때로는 부정적인, 그러다 이따금씩은 영 관계없는 대답으로 즉각 응수했을 것이지만 - 아무튼 지금은 서두를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와 같이 응답할 것이다. 우선 딴엔 적절한 대화의 소재를 선정하고, 뒤이어 그것을 담아내기 위한 최선의 표현을 구상하고(여기에는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는 데 과연 몇 번의 줄 넘김이 필요할 것인가를 숙고하는 등 작시를 연상시킬 노력이 포함된다), 마침내 그것을 전송하게 될 최적의 기회를 잡기 위해 묵묵부답 기다리는 통상의 과정을 거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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