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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Jan 13. 2024

게으름이란 두려움에 맞서

   고작해야 며칠 전 혹자의 인생에서 중요하다면 그지없이 중요할 시험이 끝났다. 그것에라고 마냥 계산 없는 성실함으로 임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간 하나의 삶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지극히 개인적인 의무감으로나 강제하던 족쇄 같은 응어리가 해소된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벌써 수일이 지난 지금 그는 무얼하고 있는가?


   '게으름'은 이전부터 스스로가 수여한 나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식어였다. 뭇 단어가 그러하듯 그 낱말도 저 수많은 듣는 이들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음에 각기 다른 이미지를 투사하겠지만, 얼핏 느끼기엔 단어의 가능한 모든 뉘앙스가 저마다 서로 다른 내 성격의 단편을 묘사하는 듯했다. 이를테면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에서 베짱이가 그러하다는 의미와 같이 긍정적인 일단에서부터 오늘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드는 한없이 부정적인 일면에 이르기까지. 돌아 생각해 보면 게으르다는 말뜻의 스펙트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정도나 대상이 아니라 누구의 입장에서 그러하냐에 따라서, 즉 게으름을 실천적인 수행이 생각했던 바에 또는 기대되는 바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야기하는 행위자의 성질로 정의한다면 애당초 그 사유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이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타인의 관점에 귀속한 그것은 아니다.


   내가 나를 게으르다고 여길 때, 그리고 그것이 단일하든 집단적이든 타자란 주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하지 않을 때, 게으름은 순수한 도덕적 판단의 잣대이다. 그런데 이 말하자면 실존주의 도덕이란 얼마나 뼈저리게 고난한 것이어야 하는가. 공상 같은 믿음을 갖지 않는 진정한 현대인들에게 도덕이 갖는 관념은 단 두엇에 그칠 것이다. 인류의 다른 보편적인 행동 양상들과 마찬가지로 법칙화할 수 있는 자연 현상으로서; 그러면서도 비근한 일상의 기로에서는 영문도 모르는 채 따라야 할, 따르게 될 자명함으로. 그러나 이와 별개로 나와 같이 온전히 주관적인 도덕성을 견지하는 이들에게 매 순간 마음속의 도덕률을 따르기란 어째서 그렇게나 어렵단 말인가. 제 순수한 주관성에 말미암아,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의 정당성에는 조금의 의심이나 회의가 있을 수 없지만, 필연적으로 결여된 보편성은 그것을 따르고자 하는 결심을 요동치게 한다. 특히나 그가 행동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기를 요구할 때, 달리 말해 규칙이 긍정적인 경우라면 더욱이. 내가 나의 사유와 행위에 전적인 책임감을 지니는 한 나는 자유롭고 따라서 이 모두는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라는, 지나치게 냉철한 현대인의 시선에는 일견 공상적으로나 비추어질 도덕의 관념으로서, 언제고 되돌아갈 수 있도록 미리 세워 받든 권위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단기적인 안목에서나 장기적인 전망에서나 아무런 소득도 기대하지 않으며 저명한 진화론과 과학적 심리학의 이론들을 거부하는 이 도덕의 존재를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다만 속 깊이 자책감의 존재일 테다. 어쩌면 주관주의 도덕은 그것이 수행됨에서가 아니라 수행되지 못함에서 가장 강렬하리 현현하는 것일지 모른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고통스런 감정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무뎌져 더 이상은 견디기가 어렵지 않은 고통이기도 하다. 만일 그 도덕이 나 자신만 아니라 공유된 집단적 규정에 근거하며 따라서 그 명령을 어겼을 때 응당한 사회적 처벌을 받았었더라면, 그러나 나의 경우에 보편적인 기대와 개인적인 기대가 일치하는 적은 거의 없었고, 전자에 부응하기가 조금도 어렵지 않았던 것과 반대로 후자의 마음을 저버리는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내렸던 형벌은 그지없는 무력감과 자책, 우울이었지만 그들은 동기 부여와 습관화란 측면에서 충분히 효과적이지 못했고, 끝내 완전히는 극복되지 못한 채 애매하게 적응해 버린 일종의 만성 질환으로 내 성격의 일부를 형성하며 버티고 있다.


   이렇게 나의 게으름은 여러 차원에서 반복하며 중첩되어 점점 더 확고한 형태로, 앞서도 말했듯이 나 자신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수식어로 굳어졌다. 하지만 웬만큼 익숙해진 지금에조차도 게으르다는 표상은 부정할 수 없을지언정 도저히 만족할 순 없는 형언이다. 질병은 어디까지나 질병이고 시리는 감정을 아예 모르는 체할 수 없는 법이기에. 그런 탓에 이번처럼 시험 기간이 되었건 그 밖의 여러 책무가 되었건 나의 외견상 자유를 부정하는 모든 계기는 안락한 도피처나 같았다. 비겁함을 알면서도, 당장에 해야 할 일들을 구실 삼아 진정 가치 있는 바를 뒤로 미루는 행태에 나 역시도 지쳤지만 그것을 극복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 이 또한 게으름의 발현이리라. 겉으로는 일체의 외부적인 구속을 답답하다 말하면서도 속내 편안함을 느끼고, 그런 자유의 제약 아래에서는 정작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는 이 상황이 끝나고서 약속된 자유의 시간에 내가 수행할 작업들을 망상하다가, 그러다 막상 자유의 시간이 당도했을 때 여과 없이 노출된 제 나태함을 부끄러워하며 괜시리 우울에 빠지는 것이 나의 똑바른 자화상이다.


   그렇지만 어째서 하지 않는 것인가? 상술한 내 도덕에의 관점은 물밀듯이 들이치는 죄의식을 해설할 뿐, 본래 그 같은 상황이 어떠한 연유로 나의 삶 속에서 수도 없이 나타나는가에 대해선 충분히 소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게으름의 발생학으로는 적당치가 않다. 이를 위해 별도의 접근법 - 스스로 수행하는, 따라서 회상으로만 전적으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심리학 - 오늘까지도 나의 생을 지배하는 무기력의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돌이켜보자면 나는 늘 새 것을 배우기를 좋아했었다.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 이따금씩 적당한 시간이 찼을 때면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 수업이든 무엇이든 여하간 도움이 될 무언가를 찾아 헤매었곤 한 것이다. 혹여 내 사정을 잘 모르는 누군가는 깊이가 얕다거나 쉽게 질려한다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것과는 달랐음을 나 자신은 알고 있다. 쉬이 불 지피는 여러 방면에의 흥미와는 별개로 내겐 어른이 된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날도 놓지 못한 진심 어린 목적의 상이 존재하고, 또 일단 어느 정도 깊이에 도달했을 때 - 내지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때면 최초의 열렬한 애정을 상실한 후라 해도 적어도 얼만큼은 눈길을 다 회수하지 않고서 때때로 그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내 다양한 관심들이 고작해야 아마추어, 그것도 입문자의 수준에 그치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이 경우에 흔해 빠진 줄거리: 대개는 문득 솟아오른 흥미에 사로잡혀 진지하게 배우기를 시작한다. 어렸을 적부터 머리 하난 좋았기 때문에, 게다가 어른이 되고서는 그 외의(예컨대 신체적인) 면에서도 특별히 밀리지 않게 되어 처음에는 언제나 칭찬 일색이다. 대략 수개월에서 일 년이 지나가도 남다른 출발점에 배우는 속도도 늦지 않아 별반 노력 없이 남들보다 앞서 있다는 자부심을 갖기엔 충분하다. 문제는 정체되어 있다는 직감이 엄습하는 때에, 나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을 때 나타난다. 관심 가진 주제가 무엇이었건 간에 특정 시점에 도달한 나는 더 열심히 노력하기는커녕 조금씩 흥미를 잃어간다. 애쓰지 않는 데다 의욕도 사그라들었으니 침체감은 나날이 심화된다. 그렇게 지리한 나날을 반복하던 차 뜻밖에 새로운 호기심에 휩싸인 나는 곧잘 그곳에로 눈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위는 한 가지 예시일 뿐이지만 거듭되는 내 행동의 패턴을 대변한다. 요컨대 더 이상 잘할 자신 없을 때엔 노력 또한 거두어들이리란 비겁한 태도. 이번에 친 시험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내 능력에 꼭 들어맞는 분야일 점수 따기용 공부만 하더라도 그렇다. 고등학교 때부터 예의 마음가짐으로 일관한 나는 교내에서나 전국 단위에서나 나름대로 상위권에 들지 못한 적이 없었지만 반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지킬 수 있는 그 가상의 선을 넘어선 적도 전혀 없었다. 대학 진학에 있어서도 달성하기 곤란한 목표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설령 그조차 실패하더라도 애초에 남들만큼 매달린 적 없었다는 핑계는 언제나 준비 중이었다. 대학에 온 이후로도 겉으로 표방했던 목표 - 장학금을 위한 최소한의 성적을 거두는 것, 그리고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상대적인 성적은 전보다 떨어졌고 외려 난 관심도 없는 내용들을 외웠다가 곧장 잊어버리겠다고 용쓰는 걸 바보 같다 여기며 최소한의 노력으로 다수의 다른 학생들보다 높은 성적을 얻는 것을 일종의 자랑처럼 여겼다. 나라고 더 나은 결과를 내심 바랐던 적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허황된 기대는 서둘러 현실적인 핑계들로 치환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마음가짐: 자부할 만큼 잘하지 못하겠다면 금세 손 놓아 버리는 것, 이는 일종의 두려움이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주위의 칭찬만 잔뜩 듣고 살아온 나의 특징은 자신의 실패나 무능력, 실상 남들보다 우월한 게 아니라는 범상함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큰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글쓰기만 하더라도 그렇다. 일전에 머릿속에 그려왔던 명문이란 이미지는 쉽사리 구체화되지 않고, 그러한 상상의 현실적은 대응물은 그다지 잘 구성된 글도, 남들의 이목을 사 반향을 일으킬 만한 물건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취한 전략은 바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언젠가 나에게 능력이건 기회이건 마땅한 성공의 조건들이 저절로 주어질 때까지. 물론 아무런 과정도 없이 그런 일을 마주할 리 없다는 걸 나도 잘 알지만, 적어도 지금 나의 확정적인 실패를 수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이성은 차라리 미루기를 택했다. 애써 나의 무능함을 감춘 채로, 당장 이곳 브런치스토리 보관함 내 여태 완성되지 못한(몇몇은 시작조차 하지 못한) 제목들과 몇 개의 흐트러진 문장들이 이 점을 폭로하고 있다, 남들 보이기 부끄러운 자화상처럼.


   하지만 언제까지나 같을 수는 없다. 내 마음속에서 점진적으로 확산하는 의심과 허탈감, 되뇌이는 반성과 죄책감에 기인하여 확고했던 신념은 이대론 의지하지 못할 불안한 버팀목으로 퇴락했다. 하나둘 나이를 채우면서 탁월함에 대한 한때의 믿음은 다만 동요하는 말소리로 바뀌었고, 나 자신의 평범함을 직면해야 할 계기들에도 어느새 무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변화와 함께 비로소 움츠랐던 용기가 찾아왔다. 그 시작은 더 이상 회피하지 않는 것, 게으름이란 미명 아래 포장된 두려움에 맞서기 위하여.



사족

   이곳 공중에다 내밀한 이야기를 적는 것은 어쩌면 어려울까 싶으면서도 기실 조금도 어렵지 않은 가장 간단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모처럼 이렇듯 글을 쓰는 것도 다분히 게으른 내 심성의 발로로서, 본래 이렇게나 고민 없는 글을 쓰려하진 않았건만 대중없는 수면과 그와는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나태한 각성의 시간들을 뒤로한 채 막상 타자기 앞에 앉은 나로서는 한순간 - 그러니까 나에게 지금과 같은 자유의 무게가 지어지기 전에 / 따라서 부지런히 매진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족했던 그 당시에 - 머릿속을 맴돌았던 영감이며 의욕이란 증발하고 단지 이리 하여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죄책감: 도덕 감정만이 남아 단념하려는 나를 겨우 채찍질하여 의자 위에 앉히고 전에 그리었던 그 야심 찬 작문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제아무리 사소한 무엇이라도 일단은 써 보라며 다그친 결과 종국엔 이 성의 없는 글이나마 맺을 수 있었던 정황으로 오직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역시 하나의 도피이다. 이것은 회피이며 자신이 도망침을 알고 조금이나마 그 가책을 덜고자 대낮에 제 부끄런 낯짝을 숨기지도 않고 되려 훤히 밝히려는 도망자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것보단 낫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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