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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Apr 12. 2024

존 바스의 키메라

   뛰어난 글은 어쨌거나 영감을 주는 글이다.


   위의 말에 꼭 모든 이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생의 경험에 미루어 단 하나의 반례도 발견할 순 없었다. 영감이 꼭 오늘과 같이 샘솟는 창조성에의 욕구(그 결과물 여하에 무관하게)를 지칭할 필요는 없다. 대체로 그렇기는 하더라도, 그보다는 잔잔한 그러나 도통 그칠 생각 없는 사유의 소용돌이나 혹은 단발적이고 강렬하며 도무지 잊히지 않을 것만 같은 신비로움의 형태로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결론은 뛰어남이란 근본적으로 그리고 최우선적으로 주관적인 판단 기준이고, 이는 기름기 쫙 뺀 서식으로 그 개요를 설명하는 데 그치기엔 못내 아쉬울 순수히 개인적인 감상에 그것이 전적으로 기반함을 의미한다. 결국 탁월함은 느껴지는/느끼는 것이다.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에는 같은 작가의 소설이 두 편 실려 있는데 그중 다른 한 권인 <연초 도매상>의 서평에는 다음의 인상적인 글귀가 있다, “가장 재미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가 존 바스". 먼젓번에 읽었던 500여 페이지 책 세 권 분량의 그 소설은 광고의 문구가 언제니처럼 상투적인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이미 제 나름의 영감으로써 나를 자극하여 그의 다른 저술 <고갈의 문학the literature of exhaustion>을 발견토록 하였으나 그 글의 한국어 번역본을 찾을 수 없었던 관계로 아쉽지만 <존 바스, 고갈과 소생의 변증법>이란 국내 도서를 대신하여 읽었고 그러고 나서는 나에게 여전한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던 유일의 선택지 <키메라>를 곧장 집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지금, 나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탁월함의 관조라는 정서에 흠뻑 도취된 채로 있다.


   소설가와 그의 걸작 <키메라>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경의의 표시로서 변변찮으나 짤막한 세 개의 문단을 아래에 적었다.



#보물을 찾는 열쇠가 보물이다는 말처럼#

작중 셰헤라자데와 마신의 환상적인 만남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주문, 그들의 말마따나 보물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곧 보물이 무엇이냐는 물음으로 귀결될 것이다. 문학 또는 더욱 광범위한 예술이란 범주에 보물을 빗대는 습관성의 표현들은 나에겐 언제나 깊은 흉터를 아로새기는 날카론 인상으로 거듭 다가왔다. 단순히 비유되는 대상의 체면을 치켜세우려는 뻔한 수작에서가 아니라 각각의 대상에 인간으로서 관여하는 방식에 있어 진정으로 동질성이 있음을 통감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 내가 가장 선호하는 구체성은 보물찾기의 비유다. 즉 새로운 예술을 접한다는 기대감은 보물찾기를 하는 이의 그것과 같으며, 책장에서 책을 끄집을 때나 극장에서 볼 영화를 고를 때에 나는 제목과 작가의 명성, 작품의 일반적인 평판이란 알려진 보물지도를 근거로, 그러나 논리에 찬 확률론이 아니라 오늘은 반드시 당첨되리라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기대와 함께 땅에 묻혀있을 보물을 파낸다. 일찍이 누보 로망의 기수로 유명한 알랭 로브-그리예도 비슷하지만 얼핏 상반되는 비유를 선보였다. 그는 아마도 소설에 관한 에세이 <누보 로망을 위하여>에서 소설이란 보물찾기나 유리병 속의 거짓 생태계와는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상기한 세 가지의 비유는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의 공통된 결론은 문학(실체로서 또 과정으로서)은 그 자체로 보물이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문학은 고리타분한 기호학의 논리(예컨대 실제의 세계와 문학의 세계라는 이분법의 고전적 도식)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존 바스의 마신과 같이 나 역시도 인류 문학사의 위대함이 서려있는 보고에서 여전히 보물의 열쇠를 찾아 헤매는 중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말마따나 보물에의 열쇠가 곧 보물이다. 차이라면 그에게는 설명을 목적으로 열쇠라는 매개자-비유물이 더 필요했던 것이지만 이미 그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회고할 입장을 타고난 나에겐 그 모두가 그 자체로 보물임이 진즉 자명했다.



#영웅이란 전형을 좇아#

그대 또한 독특함을 탐닉하는 인간이라면, 오직 유별남을 갈구하는 부류에 속한다면 존 바스의 <키메라>를 꼭 읽어보기를. 나이 마흔의 페르세우스나 벨레로폰이 그러하듯 이 소설도 생기 없는 신화의 영웅들마냥 폭삭 늙어버렸지만(이 책의 경우엔 만으로도 쉰 살이 넘었다), 그래서 사정을 익히 아는 이들에겐 일찍이 진부함의 영역으로 들어서 버렸겠지만, 빛나는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혹은 영원히 들이밈과 쓸려감의 패턴을 반복하려는 바닷물처럼 글이라는 불멸의 정체성으로 고정되어 무한히 현현하는 그의 존재를 처음 마주하는 입장이라면 독자인 그도 나와 같이 참신함의 경이에 휩싸일 것이라 확신한다. 순서상 세 번째 노벨라에서 벨레로폰이 그토록 연연해 마지않는 그것. 반신, 곧 영웅이란 어찌 보면 범속한 일생을 살아갈 보통의 그 누구보다도 틀에 박힌 전형성에 거머 쥐인 운명이란 일대기의 주인공에 불과하다. 탄생에서 과업, 영광에서 추락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패러디의 대가인 존 바스가 다름 아닌 그들의 사정을 자기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벨레로포니아드>에서 벨레로폰이 영웅의 생애 구조에 집착적으로 주목하듯이. <페르세이드>에서 페르세우스가 두 번째의, 일종의 첫 번째로부터 반전된 삶을 그려나가듯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영웅 서사를 좇아 패러디함으로써 작가는 반대로 가장 새로운 소설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내 삶 내 신탁이란 망상#

책을 끝까지 다 읽고서 하루는 영화관에 들르던 와중에 공교롭게도 <키메라>란 제목을 단 영화가 개봉했음을 알게 되었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일까? 잠깐 검색해 본 것만으로도 그것이 이상의 소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기대감에 벅차는 비합리한 감정은, 그리고 추후에 알게 된 바로 그 영화 또한 대단히 인상깊은 작품이었다는 사실과 그 덕분에 최초의 영감이 고갈되어 미완성인 채 방치하던 이 글을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는 놀라운 체험은 과연 변형된 신탁(현대 사회의 파편화된 특색에 맞추어 그 매개자/무녀로 누구 하날 지목할 수 없는)이자 일종의 범신론적 밀교의 은유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영웅적 일대기의 주축에선 한참 비켜나 있을지언정 어쩌면 나 또한 여지껏 상존하는 신화적 세계상의 한 사람 조각이자 주변인을 담당하는 것은 아닐까? 지난 며칠 사이 나의 일상을 관통한 야릇한 사건들의 연쇄에 이보다 합리적인 해명을 덧달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이와 같은 원인론이 단지 조금 더 진지한/삭막한 외양을 뗬을 뿐인 과학적 인과론에, 나의 경우처럼 자잘한 일들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인과 관계인지 단순한 우연인지 제대로 해명조차 하지 않는 그 관점에 못 미칠 까닭은 무엇인가? 이렇듯 내 머릿속을 지나 타자를 치고 있는 신체의 맞은편 화면 위에 입력되는/표상되는 잡다한 망상들이야말로 그들이 말하듯 언어는 실제로 세계의 창조란 증거이고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과 각자가 딱 그만큼씩 일리 있으며 확고부동의 뿌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한 마디로 철 지난 포스트모더니즘적 로망이 아닐까? 매 밤이면 밤마다 고요한 별자리가 들려주는 물화된 페르세우스의 이야기처럼 글이란 육신을 부여잡고 출판된 존 바스의 소설도 영원할 추억의 옛 시대를 반향하고 있다.

*chimère [ ʃimεːʀ ]  ...  3. 공상, 망상, 몽상  ㅣ네이버 프랑스어 사전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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