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시작하는 글
여기에 글을 쓰고자 한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영화 인생을 기록하려는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글을 깨우치고 난 이후로 나는 늘 새로운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하여 시작한 것이 책읽기였다. 책읽기에서 시작해서 나의 이 갈망은 전염병처럼 책읽기에서 다른 책읽기로, 또 다른 책읽기로 옮겨가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영화 보기로 번져 있었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한 때 책읽기와 명화극장으로 가득 채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거의 '강요'하다시피 하시던 아버지에게 나의 밤 늦게까지 이어지던 책읽기와, 한 방에서 온가족이 같이 자던 시절 이불 뒤집어 쓰고 몰래 영화보던 나의 이 두 '취미 생활'은 불건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아버지에게 이 취미생활로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꾸지람도 나의 취미생활을 막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나쁜 영향을 딱히 미치지 않는다 판단하신 것인지 몰라도, 꾸지람을 하시긴 하시되 진짜 노여워 하신다는 느낌을 못 받아서인지 이 취미생활은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늘 책을 읽던 건넌방 혹은 골방으로 불리우던 작은 방의 책상과 스탠드 불, 그리고 영화볼 때 쓰던 홑이불이 주는 특별한 향수가 있다. 이 멀리 타국에 와서 산지 어언 20여년이 되어도 향수병에 그닥 시달려 본 적이 없는 나이지만 앞에 얘기한 그런 조그만 소품들이나 내 추억에 대한 향수들은 가끔씩 아주 내 맘을 뒤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그래서 옛날 내가 본, 아직도 다시 또 보고 있는 영화들이 주는 향수는 그 어떤 향기로운 향수보다 나에겐 더 진한 향수가 되어 내 가슴을 후벼 판다. 그래서 내가 말머리에 "나의 영화 인생"이라고 했지만 사실 내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게 되면 아마도 그저 영화 이야기만이 아닌 나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책 이야기도 나올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나의 친구들 이야기도 나올지도 모르고, 내 가족 이야기, 내 여행 이야기 등등 나의 삶의 단편이 조각 조각으로 글 구석 구석을 장식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지금에 와서 취미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굳이 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그만큼 내 삶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영화이기에 영화에 빗대어 나의 삶을 더듬으면서 기록을 남기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책을 먼저 접했음에도 영화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한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책을 읽기 시작한 나는 책을 읽을 때 이미 내 머리 속에는 영화 한 편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책을 단순히 글자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처럼 장면 장면들이 내 머리 속에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나를 설명할 때 visual person 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쓰고 있다. 길치, 방향치인 나는 새로운 곳을 찾아 갈 때에 애를 먹지만 한 번 찾아 간 길은 까먹지 않고 기억하고, 어린 시절 봤던 얼굴을 몇 십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며 - 비록 이름은 기억 못 할 지라도,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 경험한 장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시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란 말은 나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나름의 분석에 의하면 이것이 내가 영화를 지금처럼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된 근본적이 근거이지 않을까 싶다.
나도 한 때 감히 영화쪽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었다. 나의 이런 생각을 무너뜨린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나의 영화 교과서가 되어 준 '씨네21'이나 '키노'같은 잡지들이었다. 이 잡지들에서 대단한 분들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Cinephile도 되지 않는, 영화를 그저 많이 많이 좋아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한 가지 붙잡고 늘어진 것은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이었다. 이 사랑이 나의 인생에 들어와 지금도 영화를 즐기고 있으며 사랑하는 내 아이들과도 이 사랑을 같이 나누고 있는 지금의 나를, 나는 감히 행복하다고 말해본다. 많은 세월을 지나 내가 영화에 대해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나의 영화 역사" 이지 않을까 싶다. 긴 세월 동안 내가 축적해 놓은 나만의 영화에 대한 데이터는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Bagdadcafe에 오시는 어느 누구든지 나의 글을 읽고 내가 소개하는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것으로 내가 글을 쓰는 족한 이유가 될 것이다. 앞으로 나는 그저 내가 나를 열렬히 응원하여 나의 영화 역사를 기록하는 동시에 영화를 나 나름의 방식으로 '홍보'할 것이다. 많은 여러분들이 나의 '홍보'에 동참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의 첫 고백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