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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Mar 05. 2022

2. 방랑하는 전사의 노래

 

트로이 전사의 귀환을 노래한 이야기



『일리아드』와 마찬가지로 『오딧세이』도 시작에 이 시에 대한 주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첫 장면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음악의 여신이시여,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노래하도록 도와주소서.   

트로이의 철옹성을 무너뜨린 후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가 된 다재다능한 남자.  

그는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는 살아 남기위해 자신의 부하들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험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버티며 고난을 겪었습니다.  허나 그의 노력에도

그의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지요. 그들은 죽음으로 몬 건 다름 아닌 그들의 죄.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태양의 신 하이페리온이 기르던 황소를 잡아먹었고

이에 분노한 신은 그들의 귀환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신성한 음악의 여신이시여,

기도하오니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시작하소서, 여신이시여,

그대가 정한 시점 어디에서든지.  (25, Book 1)   



모든 에픽은 음악의 여신에 대한 기도 (invocation)로 시작합니다. 첫줄에 언급된 뮤즈에 대한 기원은 시가 신비스러우며 신적인 영역에 있는 예술임을 의미 합니다. 시인은 여신에게 자신의 입을 통해 노래해 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참 겸손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줄은 호메로스의 두 번째 에픽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트로이 참전 용사의 방랑입니다. 10 년 동안의 전쟁 후에 겪는 방랑이라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 속 이야기인 돌아 온 탕자가 타지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후 겪는 방랑이 아니고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 우디와 버즈처럼 집을 찾기 위한 방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참전 용사의 방랑은 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말이며 이를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또한 호머가 오디세우스를 재치와 재능의 사나이라고 말한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10년 동안 낯 설고 물 설은 곳을 배회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정신적 자산입니다.  셋째 줄을 보면 방랑 중 낯선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 대해 배웠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배움이 있는 여정이라는 겁니다. 배움은 성장인데 이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네 번째에서 여섯 번째 줄은 방랑은 고향으로 귀환 도중 생겼다고 말합니다. 즉 귀향의 어려움입니다.  집에 가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말은 또 무슨 뜻 인가요? 이는 우리로 하여금 집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호메로스는 그 고난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를 신의 분노와 연결시킵니다. 인간의 바보같은 짓 또 신의 분노는 무슨 말인가요? 시의 시작에 언급한 이러한 주제들을 염두에 두고 『오딧세이』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집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가고자 하나 못 가고 있습니다. 작품의 시작에서 우리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다른 모든 그리스 병사들은 귀국했는데 유독 오디세우스만 고향과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못가고 있음을 봅니다. 전쟁이 끝난 지 벌써 9년이나 흘렀는데도 말입니다. 이타카의 왕은 칼립소라는 이름의 요정에 의해 포로로 정확히 말해 사랑의 포로로 잡혀있다고 간단하게 언급이 됩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반해 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고자 하지요.  그녀는 오디세우스에게 영생을 약속하며 그를 설득합니다.  인간들은 영생을 누리는 여신이 부럽지만 여신은 인간들의 가정이 부러웠나 봅니다. 이웃 집 잔디가 더 파랗고 남의 떡 이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오디세우스의 억류배경에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의 노여움이 있었다고 언급이 되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먼저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놓고 나중에 하나씩 풀어가는 호머의 내러티브 테크닉입니다. 요즈음 영화에서 많이 쓰이는 기법인데 호메로스가 그 원조입니다. 칼립소가 지배하는 섬의 동굴에 갇힌 오디세우스의 상황을 잠시 보여준 후 우리는 그의 고향 이타카로 안내됩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떠날 때 간난아이였던 그의 아들 텔레마쿠스는 이제 19 살의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고향에 오지 못하고 많은 역경 속에서 고생하고 있듯이 아버지 없이 자란 아들 역시 고향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아내인 페네로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집. 남편이 없는 집.  정상적인 집이 될 수 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무질서에 빠진 가정    


  주인 없는 집은 혼돈과 무질서에 빠져 있습니다. 남편 없는 페네로페의 새 주인이 되고자 하는 구혼자들이 오디세우스 왕의 집을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결혼만 하면 이타카의 왕이 되고 오디세우스의 재산마저 몽땅 차지 할 수 있으니 한 번 해 볼만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자와 결혼하면 왕이 된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요? 왜 장자인 텔레마쿠스가 왕이 안 될까요? 삼천년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이타카는 모계 사회였습니다. 후계자가 어머니의 라인에서 결정되며 오디세우스가 왕이 된 건 그가 여왕인 페네로페하고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이며 왕위는 여왕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구조였습니다.  왕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108 명인데 호머가 불교의 백팔번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나 봅니다. 그들은 페네로페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구혼을 합니다. 당신 남편은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했거나 아니면 오는 도중 죽은 게 확실 하니까 이제 우리 구혼자 중 한명을 새 남편으로 맞이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게다가 남편을 정할 때까지 우리는 이집에서 먹고 마시고 자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구혼자라는 명목으로 그 나라 왕인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거덜 내는 행위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관습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일리아드』에서 환대의 법칙에 대해 잠깐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파리스가 바로 이 법칙을 어기고 메네레우스의 처인 헬렌을 훔쳐 트로이로 도망갔고 이로 인해 트로인 전쟁이 일어났었지요.  『오딧세이』의 스토리 중심에도 이 법칙이 있습니다. 이는 지금 우리 시대 손님 접대 매너나 에티켓 정도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삼천년전 고대 사회에서 환대의 법칙은 그 당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모르는 나그네가 집에 찾아오면 베풀어야 하는 친절 그 이상을 말합니다. 이는 고대사회 손님과 주인(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개인 혹은 단체)의 관계를 정해놓은 일련의 법칙과 관습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손님은 주인을 모욕하거나 금전적 요구를 하거나 환대의 법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정해 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인 역시 손님을 모욕하거나 보호를 거절해서는 안 되고 최대한 대접해야 합니다. 또한 손님에게 선물을 주거나 손님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때에 손님과 주인의 사회적 지위가 동일해야 합니다.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자이므로 스파르타의 왕인 메네레우스의 집에서 환대를 받은 것을 기억하면 될 듯합니다. 다시 말해 거지가 왕의 집에 가서 환대의 법칙을 운운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때 일면식도 없는 게스트와 이를 대접하는 호스트 사이에는 서로 굳건한 믿음이 존재해야 합니다. 개인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 환대의 법칙을 어기는 호스트는 제우스에게 벌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신들은 때때로 인간의 모습을 한 여행자로 변신하여 호스트가 환대의 법칙을 얼마나 잘 준수하고 있는가를 시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행자들은 제우스가 보낸 사람으로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따라서 여행자에 대한 환대는 신에 대한 특히 제우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호머의 두 번째 에픽은 방랑자의 이야기이고 그 당시 모텔이나 호텔같은 숙박시설이 없었을 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떠돌아다니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귀한 법칙이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이런 환대의 법칙 없이도 손님을 귀하게 여기고 음식을 나누는 전통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 피에 흐르는 정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108 명의 청혼자들이 오디세우스의 집에서 먹고 자는 행위의 배경에는 바로 위에 설명한  환대의 법이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이타카 왕의 집에 와서 왕비에게 청혼을 하는 행위는 사실 잘못된 행동은 아닙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로 간지 이미 15 년이나 지났고  그에 대한 소식은 전혀 없을뿐더러 그의 생사여부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여주인인 페네로페의 의사에 반하여 가축을 잡아먹고 포도주를 축내며 주인 아들인 텔레마쿠스를 모욕하고 있는 점은 용서 받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구혼자들은 점점 대담해져서 이젠 아예 주인행세까지 합니다. 페네로페를 차지하려는 자신들의 목적을 방해하고 있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쿠스를 죽이고 이타카 왕의 재산을 나눌 궁리까지 합니다. 사실 환대의 법은 여행자들에게 보다 좋은 여행환경을 제공해주고자 만든 옛날 사람들의 지혜의 산물인데 108 명의 청혼자들은 환대의 법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환대의 법칙 중 호스트의 의무만 강조하고 게스트가 지켜야 할 의무는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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