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겉표지를 보고 판단하지 마라. (Do not judge a book by its cover.)라는 서양속담이 있습니다. 외모(appearance)와 실체(reality)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럴까요? 우리말에는 이와는 정반대로 “생긴대로 논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체는 외모만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외모와 실체는 다를 수도 있지만 같을 수도 있습니다. 보는 사람의 판단력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겉과 속이 같은 지 다른 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한번 잘못 판단하면 어떤 때는 4 년 어떤 때는 5 년을 개고생합니다. 오늘은『캔터베리 이야기』에 나타난 외모(appearance)와 실체(reality)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86년 영국 런던에서 남쪽으로 약 5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린위치. 지금은 그린위치 천문대, 본초 자오선(경도 0°), 그리니치 평균시로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에는 영국의 시인 지오프리 초서(1340s – 1400)가 살던 곳입니다. 그가 살던 지역은 런던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약 90 km 떨어져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순례 여행을 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캔터베리까지 걸어서 6 일 말 타고 가는데 4 일 걸린다고 합니다. 초서는 자신이 살던 집 창문너머로 순교한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베켓의 시신이 안치된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자 일행들을 목격했거나 아니면 그들이 지나가면서 떠드는 소리를 가끔 들었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그를 오늘날 영국 문학의 아버지라는 명칭을 얻게 해준『캔터베리 이야기』(1400년대) 를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초서는 총 120편의 이야기를 계획했지만 24 편 만을 완성하는데 그칩니다. 초서의 이야기는 두 파트 (서시+본분)로 되어 있습니다. 서시는 순례자들에 대한 묘사로 되어 있고 본문은 순례자들이 차례로 전달하는 이야기입니다.
지오프리초서(1340s – 1400)
『캔터베리 이야기』의 서시의 개요를 아래와 같이 요약해보았습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내레이터는 작가 자신입니다. 그러나 단테의 신곡에서 우리가 이미 이야기 했지만 작품 속 내레이터 초서는 작가 초서와는 구별 되어야 합니다.)
4 월. 보슬비가 내리고 따뜻한 태양, 부드러운 바람이 불면 자연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여행을 하고 싶어진다. 이맘때가 되면 영국
각지에서 토마스 베켓의 신성한 축복을 받기위해 캔터베리로 순례여행을 온다.
타바드 여관에서 머물고 있던 내레이터 초서는 캔터베리로 떠날 다음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날 저녁 29명의 손님이 여관에 도착했다. 모두 캔터베리로
향하는 순례자들이다. 내레이터 초서도 그들의 일행으로 받아드려진다.
여관주인은 손님들에게 가고 오는 동안 이야기 경연대회를 하자고 제안을 한다.
일인당 갈 때 2 편 올 때 2 편 씩 이야기를 하고 그 중 최고의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제안하고 모두 동의를 한다.
그리고 이야기할 순서를 정하는데 30 명의 순례자 중 기사가 제일 먼저 당첨된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등장인물 즉 순례자들을 보면 초서에게 영향을 주었던 단테나 보카치오의 주인공들과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곡』의 색욕지옥에서 만난 프렌체스카의 시동생이자 연인인 파울로의 직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또한 보카치오도 그가 창조한 10명에 달하는 내레이터 역시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이름, 외모, 성격, 그리고 장기입니다. 여자들은 모두 스마트하고 아름다우며 재치있고 매력적입니다. 남자들은 미남에다 지성적이며 달변입니다. 남녀 모두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 부릅니다. 이들은 보통사람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개개인이 절제, 지성, 덕성 등을 상징하는 캐릭터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초서는 캐릭터를 소개할 때 이름 대신 직업을 사용합니다. 기사, 면죄부판매자, 수도승, 수녀, 소환사, 변호사, 사무원, 학자, 공무원, 요리사, 상인, 의사, 방앗간 주인, 재봉사, 식품 재고 관리자, 목수, 선원, 여관주인 등입니다. 한층 다양해진 직업의 종사자들이며 또한 이들은 무엇보다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재정적인 여유도 있습니다. 중세시대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등장하기 시작한 중산층의 존재가 문학에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좀 더 우리 이웃 같은 모습의 캐릭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의 서시에서 참가 순례자들의 이름 대신 직업과 그 사람의 겉모습(태도, 생김새, 차림새, 소지품, 타고 온 말 등)을 상당히 디테일하게 설명합니다. 초서에게 사람의 직업과 외모는 그 사람의 이름이요 정체성입니다. 본문에는 순례자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야기 내용이 외모와 일치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즉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은 농담 같은 말을 한다는 겁니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초서의 세계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독자들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찾아야 할 점입니다. 초서는 사람의 외모와 실체가 일치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밝히고 또한 사회비평도 합니다. 오늘 지면관계상 우리는 내레이터 초서 포함 30명의 순례자 중 표리가 일치하는 기사와 방앗간 주인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기사의 모습입니다. 요즈음 개념으로 말하면 월남전이나 중동전쟁 장교급 참전 용사입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존엄 그 자체입니다.
위엄이 있어 보이지만 그는 지혜롭고
태도는 하녀처럼 겸손합니다.
그는 거친 말을 하지 않고
그의 일생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 생겨도
진실되고 완벽한 기사입니다.
그의 장비를 말하자면 그는 훌륭한 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하게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껍고 질긴 푸스티언 천으로 만든 윗도리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전투 장비가 스친 곳에는 검은 얼룩이 남아 있었었습니다.
그는 휴가를 받아 집에 온 김에 우리 일행에 합류한 겁니다.
순례로 감사를 표현하는 거죠.
초서의 묘사는 그가 이 기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나타납니다. 그 자신도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때 참전하여 프랑스의 포로가 되었다가 정부가 자신의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난 적이 있습니다. 과부사정은 홀아비가 알아주는 법입니다. 초서는 다른 순례자들의 순례 여행에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지만 이 기사는 진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온갖 종교 전쟁에 다 참전한 신실한 참전용사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임해서는 용감하게 싸웠으며 그럼에도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무용담으로 사람들을 피곤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이 기사가 전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에밀리라는 여인을 놓고 형제의 의를 맹세한 두 사촌이 싸우는 이야기였습니다. 전쟁, 명예, 사랑, 규칙, 공정의 가치를 전하는 이야기의 내용을 감안해 보면 이 기사의 직업과 외모 차림새 등과 잘 어울리는 내용의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두 번째는 방앗간 주인입니다. 초서가 묘사한 방앗간 주인의 모습은 한마디로 산적두목 상입니다. 주인은 몸무게 약 100킬로그램의 거구이며 기골이 장대한 근육질의 튼튼한 사내입니다. 힘을 주체 못하는 장사로 마을 레슬링 대회만 나가면 양을 타오고 어떤 문짝도 기둥이나 경첩에서 떼어내서 들고 뛰거나 자신의 머리로 박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저분한 술집 농담도 많이 알고 있고 또한 남을 웃기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망가지는 걸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부정직한 면도 있습니다. 초서는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곡식을 훔치는데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엄지손가락으로 곡식의 품질을 체크하곤
항상 받아야할 돈의 세 배를 챙깁니다.
여러모로 방앗간 주인은 기사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일단 그의 직업 외모 품성을 보고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상상이 가시나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존이라는 목수와 그의 예쁜 아내 알리슨 그리고 하숙생 니콜라스와 교회 사무원 압솔론입니다. 존은 여윳돈을 벌기위해 남는 방 하나를 학생인 니콜라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목수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었습니다. 목수인 존이 시장에 가자 니콜라스는 알리슨에게 추파를 던지고 곧장 둘은 침대로 향합니다. 그후 알리슨은 교회를 갔는데 거기에서 교회 사무원인 압솔론을 만납니다. 압솔론은 그녀를 보자마자 그만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달밤에 알리슨의 방 창문 밖에서 사랑의 노래를 불러 그녀의 마음을 빼앗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니콜라스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의 접근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니콜라스는 잠간씩 알리슨을 만나는 것에 성이 안차 아예 알리슨과 긴 밤을 보내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존에게 하나님께서 노아때와 같이 대홍수를 계획하고 계시니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천장에 커다란 나무 욕조 모양의 버켓을 매달아 침대로 쓰다가 홍수가 나면 이 버켓의 줄을 끊고 배로 사용하면 살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존은 니콜라스의 말을 믿고 버켓 세 개를 만들어 모두 천장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곤 그날부터 버켓에 올라가 잠을 잤습니다. 존은 알리슨과 니콜라스도 천장에 매달린 버켓에서 자는 걸로 착각했던 겁니다. 실상은 니콜라스와 알리슨은 둘이서 긴 달콤한 밤을 보내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그날 압솔론이 창가에 와서 알리슨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키스를 해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알리슨은 처음은 거절을 하다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입술대신 엉덩이를 창가로 내 밀었습니다. 압솔론은 어둠속에서 알리슨의 엉덩이에 키스를 하고 이상하다 여자도 수염이 나나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속은 것을 안 압솔론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알리슨을 혼내 주려고 뜨거운 인두를 준비 다시 왔습니다. 그는 창가에서 다시 알리슨을 불러냈고 다시 키스를 해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이번에는 알리슨이 아닌 니콜라스가 엉덩이를 들이 밀었습니다. 이 때다 하고 압솔론은 니콜라스의 엉덩이에 인두를 갖다댔고 니콜라스는 너무 뜨거워 소리를 질었습니다. 물! 물! 이때 자고 있던 존은 이 소리를 듣고 홍수가 온줄 알고 천장에 붙어 있던 줄을 칼로 잘랐습니다. 그가 탄 버켓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쿵하는 소리에 이웃 사람들이 놀라 존의 집에 몰려들었고 이야기의 지초지종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존을 놀렸습니다.
「기사의 이야기」와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는 화자를 닮은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의 핵심은 모두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싸우는 삼각관계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사랑의 의미, 사랑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사랑을 이루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기사의 이야기」는 여자를 멀리서 보고 사랑하고 애태우는 식입니다. 요즈음 기준으로 보면 일방적인 짝사랑이지만 중세 기준은 기사도에 입각한 정중하고 매너있는 사랑 (courtly love)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고 바치는 개념의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두 기사는 여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순수한 정신적인 사랑이며 결혼 전에는 결코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두기사의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함을 넘어서 거의 종교적인 수준입니다. 존엄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가 전하는 이야기 역시 품격 높은 기사를 닮아 진실하고 이상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는 정직하지 못한 주인을 닮았습니다. 우선 두 남자가 탐하는 대상이 결혼한 여자입니다. 진지한 사랑이 아니고 남편을 속이고 육체의 즐거움을 좇는 불륜의 개념입니다. 또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한 사람은 성경의 노아의 홍수를 들먹이며 사기를 칩니다. 한 사람은 밤의 세레나데로 유부녀를 유혹하려 하는데 그는 직업이 교회의 사무원입니다. 전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위치의 사람들입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모두가 동네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며 패자로 끝을 맺습니다. 방앗간 주인의 부도덕한 성품과 이야기의 내용이 일치합니다. 이번에는 생긴대로 노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다음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