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 장 28절)
이 창세기 말씀은 서양인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반영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정복대상이며 자연의 모든 생물은 인간에 의해 지배 받는 존재라는 거죠.
자연에 대한 로빈손 크루소의 태도 또한 성경의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빈손 크루소는 18세기 판 아담입니다. 크루소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에덴동산 같은 집을 나와 결국 형벌의 땅인 가시덤불 투성이의 무인도에 갇히게 됩니다. 척박한 환경의 섬에서 생존을 위해 그는 땅을 갈아 밀을 재배하며 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만들고 자연에서 생필품을 스스로 마련하며 생활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자연은 결국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며 그는 자연의 생명체를 다스리는 일종의 영주요 왕입니다. 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씁니다.
나는 그 상쾌한 계곡 옆으로 조금 내려갔습니다. 비밀스러운 기쁨을 만끽하며 계곡을 바라보았는데 비록 나의 기쁨은 내 다른 고통스러운 생각들과 섞여있었지만 이것이 모두 내 소유라고 생각하니 나는 이 지역의 불가항력적인 왕이나 영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소유권을 가졌으며 내가 그 소유권을 양도할 수 있다면 영국의 어느 장원의 영주처럼 완벽하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85)
자연을 정복과 지배 그리고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로빈손 크루소의 의식은 위 삽화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정 가운데 위치한 주인공의 모습은 자연을 압도하고 지배하고 있는 정복자 인간의 모습입니다. 크루소를 바라고 보고 있는 개와 앵무새는 그가 다스리는 신하입니다. 둘 다 절대 주인을 거스르지 않는 충성스러운 자질을 소유한 생명체들입니다. 또한 그림의 중앙에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울타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자연에서조차 인간은 울타리를 쳐 놓고 이쪽이 자신의 소유임을 천명합니다. 서구인들에게 인간 손길 혹은 이성 밖의 자연은 악의 소굴이며 야만인들의 거처입니다. 쿠르소가 쳐 놓은 울타리 저편 숲속에 어둠의 세력인 식인종이 살고 있습니다. 곧 정복해야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이러한 서구인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야기된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로 기후위기입니다. 그동안 정복대상으로 여겨졌던 자연이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제 인간이 정복당하는 건 시간문제인 듯합니다.
용기를 내서 자신의 이해력(your understanding)을 사용하라 — 이것이 계몽시대의 모토이다.
(이마뉴엘 칸트)
18세기 계몽시대가 추구한 최고의 가치는 이성입니다. 『로빈손 크루소』는 바로 이 시대의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크루소는 무인도에 조난당한 직후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나는 관찰해야만 한다. 이성은 수학의 시초이자 본질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이성으로 재고 기술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함으로써 모든 기술의 장인이 된다. (55)
그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고 그의 생존은 그의 이성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위의 삽화는 바로 이 시대의 정신인 이성의 중요성을 표현합니다. 이 삽화에 그려진 사건은 크루소가 무인도에 조난당한지 15년차에 일어납니다. 이미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진 로빈손 크루소는 어느날 바닷가 모래사장에 찍힌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숲속 저편에 살고 있는 어둠의 세력인 식인종이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크루소는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느 날 오전 12 경 내 보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다 해변가 모래 위에 선명하게 찍힌 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번개 맞은 사람처럼 귀신을 본 사람처럼 몸이 얼어붙었다. 귀를 기울였고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언덕으로 올라가 좀 더 먼 곳을 살펴보았지만 그 발자국뿐이었다. 그 발자국 이외의 흔적은 볼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그 자리로 가서 발자국이 더 있는 지 혹은 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닌지 다시 살펴보았지만 결론은 아니다 였다. 모래위에 찍혀있는 건 발, 발가락, 발뒷굼치 자국이 분명했으며 어떻게 거기에 그 자국이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전혀 상상 조차 할 수도 없었다. (121)
로빈손 크루소의 조난 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부분은 주인공이 발자국을 보고 생각에 잠긴 모습입니다. 그는 발자국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자신의 이성을 총 동원하여 그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씁니다. 그는 처음에 악마의 발자국이라고 생각을 하곤 겁을 먹습니다. 그러나 이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라 해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발자국의 발견, 관찰, 상황분석 그리고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은 칸트의 말--자신의 이해력을 사용하는 용기를 가져라—을 실천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성의 사나이 로빈손 크루소. 그는 후에 만나게 되는 원주민인 프라이데이는 크루소와 정반대로 감정이 풍부한 인물입니다. 로빈손 크루소는 무인도에 28년간 생활하면서 단 한 번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이성에는 눈꼽 만큼의 감정도 자리할 틈 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프라이데이는 다릅니다. 그는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자 키스하고 껴안고 허그하고 울고 웃고 뛰고 춤추고 노래하고 다시 울고 두 주먹을 쥐고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그러다 노래를 부르고 다시 껑충껑충 뛰고 마치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이성적인 그러나 차거운 크루소에게 필요한 요소는 바로 이 따뜻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가 두 날개로 날 듯 인간은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 움직여야 합니다.
발자국 발견 후 거의 일년 반을 공포에 살았던 쿠르소는 드디어 모래 위 발자국이 예고한 사람들의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섬 저편에 살고 있었던 식인종들입니다. 그는 이 식인종들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한 흑인을 구해 주는데 그가 바로 프라이데이입니다. 위 삽화는 프라이데이와 그의 목숨을 구해준 크루소와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원주민의 머리를 발로 누르고 있는 크루소는 그의 주인이며 지배자이며 그의 다리 아래 굴종적인 자세로 엎드리고 있는 흑인은 하인이자 피지배자입니다. 서구인의 인종적인 편견과 불의가 드러나는 이 그림은 18세기 당시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의식을 반영합니다.
무인도 생활 27년 차에 크루소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의 섬은 이제 사람들이 산다. 나는 스스로 많은 신하를 거느렸다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왕같이 보이는지 종종 생각만 해도 즐겁다. 먼저, 이 지역 전부는 내 소유 따라서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지배한다. 두 번째, 나의 국민들은 완벽하게 나에게 복종한다. 나는 절대 군주이며 법 집행자이다. 그들은 내게 삶을 빚지고 있으며 유사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세가 되어 있다. (188)
그러나 크루소가 이야기하는 국민은 프라이데이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가 구해준 스페인 사람 합해서 단 세 명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밝혔듯이 그의 국민은 가톨릭 기독교 그리고 이교도 (프라이데이의 아버지)로 어떻게 보면 각 계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들이죠. 섬을 자신의 소유로 그리고 그가 구해준 사람들을 자신의 피지배자로 생각하는 쿠르소의 의식 속에는 세계를 지배하곘다는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크루소는 늘 부를 쫓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바다로 나간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 무역을 위한 항해에서 40 파운드를 투자하여 300 파운드의 돈을 법니다. 첫 사업치고 짭짤한 수입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무역선을 타고 가던 중 해적들을 만나 납치되어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그는 같이 노예 생활을 하던 흑인 소년과 탈출을 하게 됩니다. 그 둘은 운 좋게 포르투갈 배를 만나서 브라질로 향하게 됩니다. 포르투갈 선장의 배가 브라질 행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같이 탈출했던 흑인 소년을 포르투갈 선장에게 돈을 받고 팝니다. 흑인소년은 노예 동기이자 생사고락을 같이 한 탈출 동료이지만 (게다가 그 소년은 자신의 소유도 아니지만) 돈이 생긴다면 뭐 문제 될 거 없습니다. 크루소는 브라질에 정착하여 담배 농장을 운영하며 충분한 돈을 벌었지만 이걸로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 흑인 소년을 판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를 안 팔고 자기 농장에서 부려 먹었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된 탓입니다. 그는 이때 노예 만 있으면 돈을 더 벌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 이때 노예사업에 관한 비즈니스 제안이 들어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 중 반을 포르투갈 선장에게 맡긴 후 지체없이 배를 타고 노예를 구매하러 기니로 향합니다. 그는 과거 노예 생활의 비참함과 부당함을 몸소 겪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더 많은 돈이 들어 올 즐거운 상상에 힘을 잃고 심연 속으로 가라 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도중 풍랑을 만나 시작된 무인도 생활. 28년 후 섬에서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는 자신이 엄청난 부의 소유자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무척 기뻐합니다. 그는 정착을 해서 결혼을 하지만 아내가 죽자 다시 동인도로 가는 배에 몸을 싣습니다. 돈을 벌기 위함입니다.
끊임없이 돈을 쫓는 로빈손 크루소. 그러나 그가 돈을 버는 수단과 과정은 그의 조국 영국이 국부를 축적하는 수단과 과정의 복사판입니다. 바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