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 바로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학교 친구와 선후배 사이의 관계, 직장동료와의 관계, 상사와 부하 직원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연인과 부부사이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관계의 기본인 공감과 소통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공감과 소통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인간 간의 공감과 소통의 문제도 주의력 결핍증이나 분노조절 장애처럼 관심을 갖고 치료해야만 나을 수 있는 하나의 병리현상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류최초의 공감 결핍환자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시서스입니다.
이 젊은 친구의 이야기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르시서스는 아주 잘 생긴 젊은이였습니다. 그의 미모에 반한 여자들이
그와 사랑에 빠지고 혹은 남자들이 그와 친해지려하지만 어쩐지 그는 그들을
피하고 경멸하고 증오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그 자리를 지키다 그대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공감 결핍증을 앓고 있는 이 친구는 주위 사람들과 교류가 어려운 증상을 보이며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병의 원인은 그의 미모입니다. 여기에서는 미모로 표현했지만 미모는 우월성을 나타내는 일종의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내 또래보다 더 잘났고 재산도 많고 학벌도 더 좋고 사회적 지위도 더 높다는 의식이 강하면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소통도 어려워집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사회 부적응자인 나르시서스를 해방시켜줄 유일한 탈출구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감결핍증을 적절하게 치료 했다면 그는 살아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아래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가 1928년에 연인들 2 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제 눈에는 공감 결핍증 환자의 모습입니다.
두 연인은 각자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즉 자신의 본모습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를 보지 못하고 또 상대방의 말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습니다. 아니 서로 보기도 듣기도 원하지 않기에 스스로 천을 뒤집어썼는지도 모릅니다. 서로가 볼꼴 안보고 (안 보이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동물적인 본능에 이끌려 둘의 몸은 밀착되어 키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교감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같이 데이트도 하고 같이 살기도하지만 사실은 상대방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모르는 채 혼자 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혼자 스스로를 사랑하다 죽는 나르시서스와 별반 다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공감 결핍증 환자들입니다.
공감 결핍증 환자들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습니다. 바로「식스 센스」 (Sixth Sense) (1999) 입니다. 콜이라는 소년이 영화 속에서 귀신이 되어 버린 정신과 의사 말콤과 대화에서 귀신을 매일 본다고 말하며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콜 시어 : 죽은 사람들이 보여요.
말콤 크로우: 니 꿈에서? 깨어있을 때? 무덤이나 관 속의 사람들 말이니?
콜 시어: 보통사람처럼 걸어 다녀요. 서로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해요.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봐요. 자신들이 죽은 지 조차 몰라요.
말콤 크로우 : 얼마나 자주 보니?
콜 시어: 매일요. 그들은 사방에 있어요.
영화에서 등장하는 귀신들이 공감력 결핍증 환자입니다. 콜은 이들을 보통사람처럼 걸어 다니고 사방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합니다.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인간 사회에서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문제는 콜의 지적처럼 자신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학폭 가해자들이 그렇듯이 정순신 아들 학폭사태의 가해자도 공감 결핍증 환자입니다. 가해자 학생은 나르시서스가 남을 경멸하듯이 제주도에서 온 학생을 무시했습니다. 제주도 출신이란 사실 하나로 "제주도에서 온 돼지새끼", "좌파 빨갱이", "더러우니까 꺼져라" 등 폭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명문 자사고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피해자 학생도 가해자 학생처럼 중학교 때 공부도 잘했던 학생입니다. 또한 그의 출신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유네스코 자연 또는 문화유산이 제일 많은 대한민국 관광 선호도 제일의 섬입니다. 그러나 그는 르네 마그리트 그림의 천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자신 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습니다.「식스센스」에 등장하는 귀신처럼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 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좀 더 넓은 시야로 따뜻한 시각으로 피해자학생을 바라보고 그와 잘 지냈다면 제주도에 좋은 친구가 한 명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름방학때 제주도에 놀러 갈수 도 있고... 그렇게 제주도와 출신 학생과 인연을 맺게 되면 바로 그 친구로 인해 더 많은 제주도 친구가 생기고 이 친구들은 나중에 사회생활에 엄청난 자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해자학생의 공감결핍증으로 인한 학폭은 제주도학생에 대한 정신적, 사회적인 살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신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정순신 아들은 어쩌다 공감 결핍증에 걸렸을 까요? 미모의 젊은이로 태어난 나르시서스와 같이 선천적인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명문 자사고에 입학할 정도의 좋은 두뇌와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청의 검사를 아버지로 두었으니 얼마나 어깨가 으쓱했겠습니까? 일단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면 자신보다 하수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깔보게 마련입니다. 더 글로리의 박연진이나 전재준 같은 케이스입니다. 또한 후천적인 요인도 자리합니다. 제주도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자리잡게 된 배경에 가해자 학생 본인이 쓴 글에서 밝혔듯이 조선일보 10년 구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늘 상 빨갱이 타령하는 극우 중에도 극우 선봉장 신문을 그것도 강산이 변할 때 까지 보았으니 세상을 보는 어린학생의 시각이 지나치게 편향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감결핍증의 치료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엠퍼시 (empathy) 능력을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면 됩니다. 어떻게 이 능력을 키울까요? 핵심은 아이들에게 신문 같은 논픽션보다 문학같은 픽션을 읽게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결코 문학을 전공한 제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주장이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픽션을 많이 읽는 사람이 논픽션을 많이 읽는 사람보다 엠퍼시 능력이 훨씬 높게 나온다는 연구결과에 의한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주장입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키드 (David Kidd)는 에마뉴애레 카스타노와 진행한 공동 연구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상대방이 얼마나 복잡하고 깊은 감정을 지닌 인간이란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서
그들을 바라보는데 실패하게 만든다.
연구는 이 일을 가장 잘하는 이들이 바로 소설 작가들이라고 말합니다. 작가들은 소설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 캐럭터의 입장을 경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풀롯 중심의 소설이 아닌 캐릭터 중심의 소설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무협소설처럼 선과 악이 분명한 주제가 아닌 그 경계가 상당히 모호한 내용을 다룬 소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전에 속하는 소설들이나 현대는 세계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의미합니다. 소설과 논픽션을 선정하여 소설을 읽은 그룹과 논픽션을 읽은 그룹을 테스트를 한 후 그 성적을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전자가 후자보다 엠퍼시 능력에서 뛰어난 결과를 보였습니다. 엠퍼시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 보다 대인관계를 훨씬 잘한다는 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는 결국 관계의 기본은 상대방의 감정 속에 자신을 집어넣는 일이며 타인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즉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소통을 잘하고 결과적으로 대인관계에 능숙하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니일 가이먼 (Neil Gaiman)은 「왜 우리의 미래가 도서관, 읽기, 백일몽에 달려있는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그는 특히 어린이들의 소설읽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아이들로 하여금 실제의 세계를 이해시키기 위해선 논픽션이 아닌 픽션 즉 소설을 읽게 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아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읽고 싶은 소설을 맘껏 읽게 하는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논픽션이 분석능력을 길러주는 데 기여를 하지만 소설은 더 중요한 엠퍼시 능력을 길러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공감결핍증의 치료법은 간단하나 실천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책 안 읽는 사회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주역 우리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가정에서 먼저 시작해야 하며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먼저 시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럼 아이들이 저절로 따라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정순신 전 검사가 극우성향의 신문 대신 명작 소설을 읽는 환경을 조성했더라면 아들의 학폭사건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위한 슬기로운 독서생활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