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이성의 시대인 18세기를 지나 낭만의 시대라고 일컫는 19세기로 들어갑니다. 낭만의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 세 편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그 첫 번째는 19세기 낭만주의 화가인 독일의 프리드리히가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입니다. 19세기 시대정신을 언급할 때 늘 제일 먼저 언급되는 작품입니다.
두 번째는 프랑스의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입니다. 프랑스의 군주 샤를 10세를 폐위시킨 1830년 7월의 민중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입니다.
세 번째는 영국의 작가 샤롯 브론테가 쓴 소설인 『제인에어』(1847)에 실린 삽화입니다. 인터넷 오픈 소스에서 가져온 그림으로 작가는 미상입니다. 그림은 제인에어와 그녀의 고용주인 로체스터와의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위의 세 그림은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 주제를 하나로 묶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낭만주의입니다. 낭만은 프랑스어인 로맨스의 한자권 발음이며 로맨스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낭만 (로맨스)과 『제인 에어』속 삽화는 금방 이해가 가지만 첫 번째 그림에서 보여준 자연 그리고 두 번째 그림의 혁명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먼저 첫 번째 그림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19세기 낭만파 예술가나 지식인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산봉우리의 정상에 서서 안개로 뒤 덮인 자연을 감상하고 있는 장면으로 먼저 그의 등진 자세가 눈에 금방 들어옵니다. 이로 인해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아마도 자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고 있으리라 상상합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자연은 드러낸 부분도 있지만 하얀 운무에 가린 부분이 더 많아 자연의 신비스러움이 강조됩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들게 올라선 정상이지만 저편에 더 높은 산과 봉우리가 존재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다음 목표를 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향해 등을 지고 자연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혹은 눈감은 채?) 자연을 음미하고 교감하는 그의 자세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이 선사하는 즐거움에 동참을 암묵적으로 권고하는 듯 합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19세기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재정립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18세기에 탄생한 로빈손 크루소는 자연을 이용하고 개간하며 서서히 정복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시 그대로의 자연은 악의 근원지이며 야만성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자연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가꾸고 정비되어야만 한다고 믿었죠.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며 정복대상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이러한 생각에 반기를 드는 지식인들이 등장했는데 바로 낭만주의 작가들입니다. 이들에게 자연은 신비로운 경외의 대상이며 명상의 주제이며 또한 자기 성장의 동력입니다. 19세기 작가들이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 주요 이유입니다. 자연에 대한 서구인들의 의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선구자적 역할을 한 시가 바로 오늘 읽어볼 워즈워스의「역전된 판」(“Tables Turned”)입니다. 19세기 시작을 2 년을 앞둔 시기인 1798년에 발표된 시로 19세기를 낭만주의로 이끈 작품 중 하나입니다.
뒤집어진 판 (윌리엄 워즈워스)
일어나시게 일어나시게, 친구여. 책을 놓으시게
아니면 몸이 두 배로 불을 테니.
일어나시게 일어나시게, 친구여. 인상을 펴시게
왜 이리 힘들게 고통을 겪고 계신가?
태양은 산머리 위에 있고
신선하고 잘 익은 태양 빛이
넓은 초원 위에 퍼져있으니
첫 번째 달콤한 황금빛 저녁이 되었네
책. 그건 지루하고 끝없는 투쟁이지.
이리 오시게. 숲 속 홍방울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보시게
그의 음악이 얼마나 달콤한지, 맹세코
그 안에 더 많은 지혜가 있다네.
그리고 들어보시게! 티티새가 얼마나 즐겁게 노래하는지!
그 역시 따분한 설교자는 아닐세!
사물의 빛 가운데로 들어오시게
자연이 자네의 스승이 되도록 말이지
그녀는 우리의 마음과 심장을 축복해 줄
준비된 부의 세계를 갖고 있고
건강하게 숨 쉬고 있는 자발적인 지혜
유쾌하게 숨 쉬고 있는 진리도 갖고 있네.
봄의 숲에서 일어나는 충동은
자네에게 인간에 대해 도덕적 악에 대해 선에 대해
모든 현자들보다
더 많이 가르친다네
달콤함은 자연이 선사하는 전설의 노래
간섭을 좋아하는 우리의 지성은
사물의 아름다운 형태를 흉물스럽게 일그러뜨리지
우리는 해부하여 살인을 하고 있다네
과학과 예술은 이제 그만
그 아무 쓰잘 떼기 없는 책은 접으시게
이리로 오시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마음만 가지고.
이 시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18세기 이성의 시대를 비판합니다.
우리는 해부하여 살인을 하고 있다네 (We murder to dissect).
과학과 예술은 이제 그만 (Enough of Science and of Art;)
이성의 주된 임무는 모든 사물을 나누고 쪼갠 후 분석하는 일. 시인에게 과학은 살인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과학을 멈추라고 호소하는데 여기에 예술이 포함된 게 의아합니다. 시인은 종이 위에서 행해지는 과학과 예술 행위를 비판한 겁니다. ( 결국 워즈워스의 시도 종이 위에 인쇄되어 나왔는데 아이러니합니다.) 그의 결론은 이제는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자연이 자네의 스승이 되도록 말이지 ( Let Nature be your teacher.)
낭만주의의 시작은 자연에 대한 서구인들의 인식의 변화를 주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우리의 스승이라는 생각입니다.
워즈워스의 뒤집어진 판에서 "판"은 좁은 의미로 생각해 보면 교육하는 장을 가리킵니다. 그 장은 이제 책이 아니라 더 효과적인 자연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죠. 그러나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이 "판"은 시대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서 자연과 감성의 시대로 전환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예사적이고 철학적인 사고의 전환을 의미할 뿐 실제 서구인들의 의식과 생활은 사실상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서구인들은 지식인들의 권고와 경고를 무시한 채 더욱더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자연은 무참하게 파괴되어 왔습니다. 워즈워스 태어나기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자연과 더불어 살자는 노자 장자의 철학을 배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 나라들 또한 자연파괴에 힘을 보탰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해마다 전 세계 도처에서 겪는 물난리는 자연이라는 이름의 스승을 거스른 대가입니다.
다음은 낭만시대와 혁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세기는 혁명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럽 도처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영국의 압제와 싸워 승리한 미국 독립 (1776), 군주제와 싸워 민주화의 초석을 세운 프랑스혁명 (1789, 1830) 스위스 혁명 (1830) 독일 혁명 (1848-9), 오스트리아 혁명 (1848) 등 모두 19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낭만시대와 혁명.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