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실체보다는 겉모습을 보고 판단한다. 우리 모두 눈을 갖고 있지만 실체를 꿰뚫는 눈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표지를 보고 책의 내용을 판단하지 말고,” “선물포장을 그 안에 든 선물과 착각하지 말라.” 외모에 현혹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은 넘쳐나고 이들의 실체를 꿰뚫어보는 눈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미디어를 달구고 있는 전청조 사기 결혼 사건의 본질도 결국은 표지와 내용을 혼동한 탓입니다. 전씨는 서울 롯데 시그니엘에 거주하는 재벌 3 세로 자신을 소개하며 결혼을 약속한 남현희씨에게 시가 3억원 짜리 SUV 벤틀리 벤테이가, 크리스천 디올 가방 등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럭셔리 최상급 포장에 안 넘어갈 여자가 있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 급 인물입니다. 어떻게 보면 남현희씨는 유명해서 범죄의 타겟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한 덕분에 더 이상의 피해를 보는 상황은 모면한 듯합니다.
이러한 양두구육형 사기 사건은 일일이 보도가 안 될 뿐 실제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합니다. 포장을 내용으로 여기고 결혼한 후 평생을 약속한 사람의 본모습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사람들 너무나 많습니다. 게이와 결혼한 여자, 유부남과 결혼한 처녀, 의사 흉내내는 사기 전과자와 결혼한 여성 사업가까지 별의 별일이 다 있습니다. 사기 당하고 이혼으로 해결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최악의 경우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결혼하여 같이 살던 남편에게 살해당한 아내의 이야기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죽는 그 순간까지 남편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내는 늘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남편을 가장 잘 안다고 믿으면서 신뢰했지만 사실 남편은 철저하게 자신의 실체(빚, 스토킹 범죄전력)를 감추며 살아온 전과자였습니다.
겉모습에 속지 말라는 주제를 다룬 유명한 동화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프랑스 동화『미녀와 야수』입니다. 눈이 펑펑 오는 아주 추운 겨울 추한 모습의 거지 노파가 성에 사는 젊은 왕자에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네며 하룻밤 자고 갈수 있도록 간청합니다. 그러나 왕자는 노파의 추한 얼굴에 역겨움을 표시하며 냉정하게 거절 합니다. 그러자 노파는 왕자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겉모습에 속아 그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사실 추한 노파는 아름다운 요정이었습니다. 다 낡은 포장 안에 숨어있는 내용물이 보석임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요정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내친 벌로 젊은 왕자를 추한 괴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기 당한 사람 중 이 동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겉모습은 무시하고 증거에 올인 하라. 이 보다 더 좋은 규칙은 없다.” 우리 인생에서 이보다 더 실용적인 충고는 없습니다. 이 명언의 출처는 프랑스 동화『미녀와 야수』를 벤치마킹하여 쓴 찰스 디킨스의 13 번째 소설 『위대한 유산』(1861) 입니다. 이 소설은 증거와 실체를 무시하고 (프랑스 동화의 야수처럼) 겉모습의 허상만 쫓다가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의 성장스토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원작은 영화로만 지금까지 무려 9 번 또한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로 5 번이나 제작되었으며 올해에도 OTT 용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습니다. 2023년 영국과 미국에서 방송된 이 작품의 한 에피소드의 시청자가 영국에서만 무려 4백 51만 명을 기록합니다. 1860년 1 월 문학잡지(All Year Round) 에 첫 회가 연재된 그 순간부터 150여년 이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인기를 유지하는 이유. 바로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당하고 깨달으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망각한 채 또 어김없이 당하는 “겉모습과 실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 9 편의 영화중 최고로 꼽히는 1946 데이비드 린 감독 작 『위대한 유산』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은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쓰는 자서전 형식의 글로 첫 챕터의 세 문단에 소설의 방향과 주제를 제시합니다. 그 시작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성은 피립이고 나의 크리스천 이름은 필립이지만 나의 유년시절의
혀로 그 두 이름을 핍 보다 더 길고 더 명확하게 발음을 못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핍으로 불렀고 그래서 내 이름은 핍이 되었다. (35)
일곱 살 정도의 아이인 주인공의 이름이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로부터 받은 게 아니라 부모의 이름에 근거해서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이름조차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핍의 처지.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고 헤쳐 나가야 하는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고아로 태어나 누나 집에 살고 있긴 하지만 누나는 동생의 보호자가 아닌 핍박자입니다. 또한 늘 자신에게 친구처럼 대해주는 덩치 큰 순둥이인 매형이 있긴 하지만 핍이 볼 때 그는 누나의 기세에 눌려 꼼짝도 못할 뿐 아니라 글도 모르는 무식한 대장장이에 불과합니다. 핍은 자신의 이름도 스스로 정한 것처럼 자신의 미래도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이름에 대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위대한 유산』은 꼬마 주인공의 미래—진정한 이름--를 찾는 성장 스토리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두 번째 문단의 글은 이 소설의 주요 주제 중 하나—겉모습과 실체—에 대한 언급입니다.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분 중 어느 한 분의 비슷한 모습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진이 나오기 오래 전의 시절인 관계로), 나는 처음에
두 분의 모습을 엉뚱하게도 그분들의 묘지석을 보고 유추해보았다. 아버지의
묘비의 글자의 모양을 보니 아버지는 까만 색 꼽슬머리에 각지고 건장하며
거므스름한 남자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었다. (35)
핍은 사진도 없고 그 비슷한 모습도 본적도 없는 부모의 모습을 유추해보려 애를 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겉모습(묘비석의 글자)을 보고 그 내용(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길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까맣고 각이 지며 건장하다고 말한걸 보면 묘지석의 글자체가 요즈음 컴퓨터에 있는 맑은 고딕체를 닮은 글씨체가 아닌가 상상해 봅니다. 아마 묘비의 글씨가 궁서체를 닮은 영어였다면 부드럽고 온화하며 뭔가 예술적인 모습의 아버지를 상상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우리의 뇌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도록 프로그램 되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명품을 몸에 두르고 럭셔리 아파트에 살며 수퍼카를 선물하는 전창조를 자동적으로 재벌 3세로 인식하며 벙거지 모자에 허름한 옷을 걸치면 노숙자로 받아드립니다. 겉모습을 보고 실체를 판단하는 핍.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세번째 문단의 시작 부분의 키워드는 “정체성”입니다.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집은 바다길 20 마일 내의 강이 휘감아 돌아가는 강 아래 위치한 습지대
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어느 을씨년스러운 오후에서 저녁때로 접어 들 무렵
나의 첫 번째 무엇인가 “정체성”에 관한 선명하고도 광범위한 인상을 얻게 되었다.
(35)
여기서 언급하는 정체성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미 사망한 자신의 부모, 그리고 먼저 죽은 형제들뿐만 아니라 곧 만나게 될 탈옥수 맥그위치 그리고 핍의 정체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시작 시간을 밤으로 설정하고 핍이 사는 집을 늘 안개가 끼는 강의 습지대 근처에 위치시킨 작가의 의도에서 알수있듯이 사람들의 정체성 즉 진정한 모습은 어두운 밤과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속에 쌓여 있습니다. 물론 주인공 자신의 모습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제 겉모습과 실체에 얽힌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두운 밤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부모와 형제의 묘지 앞에서 놀고 있는 핍의 인생이 (『미녀와 야수』에서 왕자의 삶처럼) 훗날 뒤집어지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어린 꼬마 앞에 교회의 무덤 사이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튀어 나옵니다. 그는 회색 죄수복에 발에는 쇠뭉치로 만든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다 떨어진 신발에 걸레가 다된 천을 두건처럼 머리에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탈출한 탈옥수 매그위치(Magwitch)입니다. (그의 이름에 붙어있는 마녀—witch--에서 알 수 있듯이 매그위치는『미녀와 야수』에서 나오는 요정의 영국 버전입니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탈옥수의 협박을 받기는 했지만 위험에 처한 탈옥수를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긴 핍은 집으로 돌아가서 탈옥수의 존재를 비밀로 지키며 그가 필요로 하는 음식과 술 그리고 족쇄를 자를 수 있는 톱 줄을 훔쳐 갖다 줍니다. 매그위치가 탈출한 밤 또 한명의 탈옥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날 밤 매그위치는 도망갈 수 있었지만 자신의 탈옥도 포기한 채 또 한명의 탈옥수를 잡아 추적대에게 넘긴 후 순순히 체포됩니다. 이후 핍과 매그위치는 헤어지게 되지만 핍의 의식에 탈옥수는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모습--사회의 바닥 중의 바닥인 최하층의 범죄자—으로 각인됩니다. 그러나 핍이 베푼 이 작은 친절은 결국 핍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