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생각나는 명절이 되면 생각나는 영시 한편이 있습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이니스프리의 호수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입니다. 이 시는 주로 시인이 타지인 런던에서 고향의 자연을 그리워하는 목가적인 주제나 좀 더 광의로 해석하여 19세기 산업화와 물질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노래하는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자연(호수섬, 콩밭, 꿀벌, 숲 등)은 유럽의 낭만주의 전통의 산물이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이츠의 민족주의 어젠다입니다. 오늘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예이츠의 정치적 의도에 초점을 맞추고 읽어봅니다.
William Butler Yeats ( 1865-1939)
「이니스프리의 호수섬」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먼저 이 시가 탄생한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콘텍스트 그리고 이런 환경에 놓인 시인의 삶을 먼저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시를 읽는 다는 건 마치 충북 보은 속리산 입구에 심어진 정이품 소나무를 서울의 한 공원으로 옮겨 심은 후 감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슬라이고에서 1865년에 태어났습니다. 무려 800 년 간 아일랜드를 지배해온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뜨거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아일랜드 내부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가톨릭 보수파와 영국과의 연방제도를 유지하며 자치 정부를 수립하자는 프로테스탄트 진보파가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낮에도 상대에 대한 테러와 암살을 감행하던 때였습니다. 시인의 탄생 2 년 후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Ireland Republican Brotherhood)주도의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The Fenian Rising, 1867)가 발발합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아일랜드인들은 계속하여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추진하게 됩니다.
1867년 예이츠 아버지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아일랜드를 피하기 위해 가족을 설득해 영국 런던으로 이주합니다. 그 이후 예이츠는 런던과 아일랜드를 오가며 생활합니다. 20살이 되던 1885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예이츠의 주요 관심사는 목가적인 전통의 시나 그 당시 유럽에 유행했던 인도의 신비주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젊은 시인은 자신의 삶과 시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어준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아일랜드의 유명한 애국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페니안 무장봉기의 리더인 존 오리어리입니다. 존 오리어리는 예이츠에게 아일랜드 전통에 관한 책을 빌려주며 아일랜드인의 민족적인 자존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시를 쓸 것을 권유합니다. 시를 통한 문화 민족운동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존 오리어리의 영향으로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에도 가입한 예이츠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씁니다. “존 오리어리를 만난 이후 나의 주제는 아일랜드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이 모든 사람의 기억에 남게 만드는 민족 문학을 소유할 수 있다면 난 반(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으로 갈린 우리 조국도 하나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면서도 통렬한 비평을 통해 지역주의를 벗어난 유럽 대륙의 산문 말이다. (102)
1887년 영국 런던으로 돌아온 예이츠. 이 후 예이츠의 시는 아일랜드 문화 부흥에 초점을 맞춘 민족주의적인 주제와 민족의 통합이라는 정치적인 어젠다를 띄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언급하는 자연이 우리 눈에조차 친근한 느낌을 갖는 건 그가 의식한 지역주의의 탈피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탄생한 시가 (1888년에 완성하고 1890년 발표) 바로「이니스프리의 호수섬」입니다.
시가 탄생하게 된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시의 첫 연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이제 일어나리라 그리고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그곳에서 작은 오두막집을 지으리라, 진흙과 작은 가지로
아홉 줄 콩밭을 가지리라, 꿀벌 집을 치리라.
그리고 벌이 웅웅대는 숲에서 혼자 살리라.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첫 줄은 예이츠가 자신의 고향인 슬라이고의 로크 질 호수 있는 이니스프리 호수 섬으로 가고 싶은 열망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굳이 “일어나서” 가겠다고 하는 점이 눈에 띕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의 돌아온 탕자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를 암시(allude)하는 표현입니다. 예이츠는 고향인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아버지를 떠나 돼지농장에서 개고생하고 있는 돌아온 탕자에 비유합니다. 탕자는 타지에서 고된 노동으로 쓰러져 있었듯이 시인은 객지에서 정신적으로 쓰려져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시적 주제에 대한 뚜렷한 방향도 없었으며 또한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의 일원으로 조국의 독립에 기여한 바도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어나서 이니스프리 호수섬으로 간다는” 표현은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조국 아일랜드)곁을 떠나온 자신을 반성하고 앞으로 조국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가 가고픈 섬(이니스프리)의 이름—자유(free)의 섬(Innis)--에 시인의 정치적 어젠다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바로 조국의 자유와 독립입니다.
그 다음 줄에 등장하는 소박한 전원생활의 풍경을 묘사한 시어 “작은 오두막집,” “콩밭,” “꿀벌” 등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콩밭”과 “꿀벌” 은 19세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숲속에서의 생활』(1854)에서 차용한 표현입니다.『월든』의 한 챕터를 차지한 「콩밭」과 함께 등장하는 양봉은 이 수필집의 발간 이후 미국의 초월주의 철학자가 주창한 자급자족 (self-reliance)을 상징하는 어휘가 되었습니다. 십대 때부터 소로우의 『월든』에 심취했던 예이츠는 “콩밭”과 “꿀벌”을 통해『월든』의 자급자족의 철학을 시사합니다. 또한 꿀벌은 용감하고 대담하고 부지런하며 충성스러운 뿐만 아니라 특히 자신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 같이 감시하며 함께 싸우는 협동정신이 투철합니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는 아일랜드 인들에게 필요한 정신입니다. 첫 줄에 시인이 갈망하는 조국의 자유는 둘 째 줄의 자급자족과 용감, 충성, 협동이 없이는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줄의 이어지는 “혼자 살리라”에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숨어 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이 자유를 얻은 후 자급자족, 협동하며 하나로 뭉쳐 살자는 거죠.
다음 연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하여 평화를 누리리라, 평화는 물방울 떨어지듯 천천히 오므로,
귀뚜라미 우는 곳에 아침의 베일로부터 떨어지는 한방울
그곳은 자정만 되면 모두 희미해지고 오전은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곳.
그리고 밤이면 방울새의 날개소리가 가득찬 곳.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t's wings.
두 번째 연은 “그리하여 평화를 누리리라” 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물방울 떨어지듯 천천히”옵니다. 평화가 느리게 진행된다는 말은 당시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암시합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도 요원하지만 반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는 아일랜드의 분열된 정치상황이 두부 자르듯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씩 천천히 떨어지는 그 평화의 물은 시인의 평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물방울의 원천—이니스프리 호수섬—에 희망을 겁니다. 그곳은 아침에는 베일(안개)이 깔려있고 자정에는 희미해지고 오후는 보라색으로 반짝이며 저녁에는 새의 날개 짓으로 가득 한 아름다운 섬. 숲속에서 요정이 갑자기 튀어나올 것 만 같은 그 곳은 평화의 섬입니다.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자연(안개와 숲), 물질(빛과 어둠), 색(빨강과 파랑)이 겹쳐지거나 혼합되어 연출하는 꿈 같고 신비스러운 이미지에는 시인이 염원하는 화합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상반된 두 세력이 합쳐져 공존하며 신비로운 미를 생성하듯이 조국의 두 분열세력들이 서로 화합하여 평화를 이루자는 통합의 메시지입니다.
세번째 연입니다.
나는 이제 일어나 가리라,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호수의 물이 호숫가에 나지막하게 찰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길 위에나, 잿빛 포도로 위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내 가슴의 깊은 그 심연에 그 소리를 듣느니.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a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마지막 연에서 조국 아일랜드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심정이 돌아온 탕자의 언어(“나는 이제 일어나 가리라”)로 반복 됩니다. 이제 시인의 호수섬에 대한 환상은 환청( “호수의 물이 나지막하게 찰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니”)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여전히 런던의 삭막한 잿빛 포도 위에 있습니다. 시인은 “나” (I)를 매줄 삽입하여 회색빛 콘크리트 도시 런던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크로즈 업시킵니다. 런던의 잘 포장된 도로는 물질주의, 상업주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의 질서와 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이츠가 선택한 형용사 “잿빛”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은 제국주의의 종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환청은 시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집니다. 마치 호수에 떠있는 이니스프리 호수섬이 물소리가 되어 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 간 듯합니다.
끝으로 이 시의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소리 없이 의미로만 영시를 감상하는 것은 김광석의 노래를 음악 없이 눈으로 읽는 것과 같습니다. 시의 의미를 생각하며 영어로 천천히 읽어보면 이 시 전체에 반복되는 소리의 조화와 규칙적인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첫 연부터 다시 읽어 봅니다.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아이 어라이즈 (I, arise)/ 고우 나우 고우 (go now go)처럼 같은 음이 반복되고
앤드(and), 데어 (there) 윌 (will)처럼 같은 단어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반복됩니다. 캐빈, 클레이(cabin, clay)/ 해브, 하이브, 하니(have, hiv,e honey)/ 리브 얼로운(live, alone)은 두운으로 나인, 빈(nine, bean) / 프리, 비(free, bee) / 메이드, 라우드, 글레이드(made, loud, glade)는 각운으로 음의 하모니를 이룹니다. 프리와 비(free, bee)의 운은 자유와 꿀벌의 용기/ 협동정신을, 메이드와 글레이드(made, glade)는 인간과 자연을 이어줍니다. 소리(sound)와 의미(sense)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소리의 조화와 규칙적인 리듬은 두 번째 연에서도 계속됩니다.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t's wings.
피스(peace)가 반복되고 데어(there)는 웨어(where)로 또 드로핑(dropping)은 다음 줄에 다시 반복됩니다. 엠(m)계열의 사운드(from, morning, midnight, glimmer)가 연속해서 이어지고 다음은 엘(l) 계열의 소리(all, glimmer, glow, full linnet)가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슬로우는 글로우(slow, glow)로 싱스는 윙스(sings, wings)로 운을 맞춥니다. 슬로우 글로우는 빛이 천천히 반짝이는 느낌이며 싱스와 윙스를 연결시켜 홍방울새의 퍼덕이는 날개로 노래를 부릅니다.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a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마지막 연은 아이(I)가 계속 이어집니다. 두 번째 라인에 엘 (l) 계열의 소리--레이크, 래핑, 로우( lake, lapping, low)--가 나란히 자리합니다. 데이와 그레이(day. gray)의 운율은 매일 매일이 잿빛같은 또한 쇼어와 코어(shore, core)는 호수가가 마음의 한 가운데 존재한다는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시 전체를 통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사운드는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마치 시인을 따라 호수섬에 간양 이니스프리 호수가에서 나지막하게 찰랑거리는 물 소리가 우리 귀에도 울리는 듯합니다.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수섬」은 시어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그림과 음악 소리 그리고 그 의미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는 한 편의 뮤직 비디오같은 시입니다.
에필로그
예이츠는 평생 조국의 독립 그리고 가톨릭 보수세력과 프로테스탄트로 진보세력의 통합을 염원하는 내용의 시를 많이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 두 파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아일랜드 내전(1922-23)으로까지 이어지며 결국 아일랜드는 현재 영 연방 자치국인 북아일랜드(프로테스탄트)와 독립국인 아일랜드 공화국(가톨릭)으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문학으로 세상을 바꾼다? 참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예이츠의 시를 읽으면 이상하게 위로를 받는 느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좌우의 대립과 갈등은 우리 인류 역사의 한 흐름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