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열어 주신 분들

by 선지은


초등학교서 고등학교, 12년 동안 매년 담임이 바뀐다. 대략 10명 정도의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에게서 많은 지식을 배웠다. 그런 지식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겠지만, 누구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유독 기억나는 선생님들은 나의 길들을 열어주신 분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은 여선생님이셨다. 그때 시골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도 꽤 멀어서 종종 지각도 했다. 그래도 꾸중하지 않고, 유난히 예뻐해 주신 기억은 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밖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가 수업시간에 너무 늦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혼내지 않으셨다. 건강한 친구들이 그네를 다 탄 뒤에, 그네를 타고 싶어 몰래 타는 것을 보셨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선생님은 2년 후에 시내의 초등학교로 전근하셨다.


그리고 3학년 말쯤에,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연락을 했다. “지은이를 시골 학교에 두지 말고, 시내 학교로 전학시켜서, 공부를 더 시켜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렇게 부모님을 여러 번 설득해서, 부모님은 시골의 집과 석유 파는 가게를 다 정리하고 시내의 셋방으로 이사를 했다. 시골 학교서는 공부를 별로 안 해도 늘 100점을 맞았다. 그런데 시내 학교에 가서, 처음 본시험에 나는 40점을 맞았다. 풀이 죽은 나를 찾아오셔서, “처음이어서 그래, 넌 잘할 수 있어”라고 격려해 주셨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공부의 길을 열어주셨다.


6학년 때에 담임선생님은 체육 담당 선생님이셨다. 장애인인 나는 체육 선생님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어느 날, 너희들의 미래 꿈을 원고지에 3매 이상 적어서 내라고 하셨다. 그리고 같은 꿈을 이룬 사람들을 찾아서, 미래의 목표로 삼으라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 꿈과 미래 희망이 없었다. 친구와 셋이서 머리를 맞대었다. 우리 짧은 지식으로는 마땅히 떠오르는 위인들이 없었다.


이런 우리를 보던 한 친구 언니가 내게 “너는 뭐가 하고 싶어?”라고 했다. “저는 사람들 안 아프게 치료해주고 싶어요”라고 했다. 언니는 슈바이처 위인전을 주며, 읽고 쓰라고 했다. 그렇게 슈바이처를 닮아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썼다. 친구는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가 꿈이었고, 키가 작았던 친구는 김강섭 피아니스트를 닮고 싶다고 썼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꿈을 도화지 한 장에 다 적게 했다. 그리고 타임캡슐처럼 대나무 통에 넣어서, 본인이 꼭 보관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 후에 만나자고 하셨다. 우리는 오랫동안 선생님과 연락해서 만났다. 내가 치대를 갔다고 하자, 대단하다고 칭찬하셨다. 선생님은 큰 꿈을 꾸게 해 주셨다. 다 이루지 못해도 그 길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꿈의 시작을 심어주셨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장애로 인해 모든 것에 반항했다. 선생님이 출석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삐딱한 태도였다. 반항하는 친구들끼리 ‘죽고 싶은 모임’도 만들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호출했다. 다짜고짜로 “너 내가 지켜보고 있어! 잘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맹인 가수 이용복도 있고, 휠체어 타는 루스벨트 대통령도 있다.. 너도 잘 해낼 수 있다.”라고 하셨다.


그 후로, 선생님이 지켜보는 눈길 속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이 나를 지원하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은 큰 동기가 되었다. 선생님은 가정과 몸의 아픔으로, 비뚤어지고 반항적이던 십 대를 잘 넘기게 도와주셨다. 불우해도 세상을 개척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고2 때 수학여행을 설악산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못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너도 무조건 간다.”라고 못 박으셨다. 선생님은 맨 뒤에서 나의 손을 꼭 잡고, 설악산의 곳곳을 다 데리고 가셨다. 좀 늦어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 선생님의 땀에 젖은 손, 꽉 잡고 끌어주던 손을 잊을 수가 없다. 울산바위까지 다 올라갔을 때, 먼저 온 친구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선생님은 내게 산을 오를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 무엇이든 하면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셨다.


고2가 되자, 진로를 어디를 정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어를 가르치는, 미혼인 여선생님이 계셨다. 당시엔 파격적인, 반바지 치마도 입으셨고, 시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걸어 다니는 자유로운 선생님이셨다. 수업시간에도 너무 공부에만 몰입하지 말라고 하셨다. 교정의 봄꽃도 보고, 가을 단풍과 하늘도 즐기라고 하셨다. 지금의 십 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인데, 공부보다 인간적인 매력, 감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자유분방한 선생님이 나에게 뜨개질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뜨개질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 ‘생의 한가운데’나 ‘데미안’을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실은 토론이 아니라 선생님의 해석에, 인생에 대한 시야가 열렸다. 어느 날, “내 동생도 치대 다니는데, 너도 거기 가면 어떠니?. 의대처럼 인턴, 레지던트 과정이 없어서, 힘들지 않고, 미래도 밝을 거야”라고 적극 권유하셨다.


나는 치대의 메리트도 좋았지만, 선생님의 삶의 방식이 좋았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선생님의 모습이 신선하고 부러웠다. 사람들의 눈치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함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의 편견에 주눅 들지 않는 자존감을 많이 가지게 해 주셨다. 나는 치대를 들어갔다.


선생님은 먼저 생을 살아본 사람이란 뜻이다. 선생님들은 나의 미래의 길들을 열어주셨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듯한 막막함 가운데에서, 등불을 비추어 주셨다. 장애가 있어도 공부하면 된다고 길을 열어 주고, 반항을 멈추게 하고, 도전하는 자신감을 주고, 불투명한 미래에 청사진을 보여주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며,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길을 못 찾아 헤매었던 삶의 모서리마다, 먼저 살아본 선생님들의 따뜻한 시선과 인도들이 있었다. 그분들이 길을 열어주신 분들.. 나의 ‘선생님’이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