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말할 수 없었다 2: 하늘이 맡긴 아이
아직 학생인 아들이 일찍 결혼하겠다고 하며,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 남들이 보기에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다. 남편은, 아들이 아직 학생인데,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아들은 외국에서 공부하면, 몇 년 동안 서로 잘 만날 수도 없으니, 결혼해서 같이 가겠다고 했다.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 며느리가 돈을 벌어서, 자립해서 살겠다고 둘은 각서까지 썼다. 결혼해서 간 뒤, 며느리가 취직하기도 전에, 임신했다고 연락이 왔다. ‘대책이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학비는 물론 지금까지 생활비를 보태주어야 했다.
그런데 둘이 서로 살아온 환경이 아주 달랐다. 며느리 집은 아주 가정적인 집이었다. 아이들 일에 세심히, 일일이 신경 쓰고, 가족 중심이었다. 반면에 우리 집은 자율적인 집이었다. 둘이 이사하면 우리는 알아서 가구사고, 배치하라고 하는 편이었다. 사돈은 미리 먼저 가서, 각 방의 크기를 재고, 일일이 가구 배치와 이사까지 다 해주었다. 우리는 이사비용은 주어도,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라는 편이었다. 그러니 둘은 사사건건 작은 일들로 부딪혔다.
며느리는 아들도 가정에 일일이 관심을 가지고, 신경 써 주기를 원하고, 무엇이든 가족과 함께 지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 학업과 친구 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기쁨이라 이름 짓고 기다리던 손자가 태어났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더니, 아이 눈동자가 너무 흔들려서, 정밀 검사를 한다고 했다. 점점 정상적인 발육을 하지 못해서 돌이 되어도 잘 걷지 못했다. 나도 장애인데 손자가 장애였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부터 나왔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아들 내외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아팠다. 내가 살아온 장애인의 삶을, 손자도 산다니 앞이 캄캄했다. 손자가 이 험한 세상을 장애로 살아갈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을 칼로 찌르듯 아팠다.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아들 내외의 아픔은 얼마나 더 클까 생각하니, 눈물만 났다.
어느 날,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았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발에, 하나님의 손과 발이 같이 겹쳐지며, 같이 못이 박히고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도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못 박히며 아파하셨구나.’라고 느꼈다. 그 그림이 내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장애로 살면서, 내가 세상에 바로 서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지,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부모님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채로, 수십 년 동안 나를 바라보았는지, 이제야 느껴졌다. 아버지도 나와 같이 힘드셨구나. 내 인생 뒤에서, 나와 같이 못 박히셨구나. 그래서 어떻든지 돈을 모으려 애쓰고, 가르치려고 하셨구나. 아버지의 아픔이 와닿았다. 이제 내가 부모가 되니, 병든 아이를 맡은 아들의 고통이 와닿았다.
손자는 여기저기 병원을 늘 가야만 했다. 재활 치료를 위해 병원에 몇 달씩 입원했다. 진행을 늦추기 위해 며느리는 모든 노력을 했고, 나는 모든 치료비를 감당했다. 아들은 손자가 떼를 쓰고, 걷는 훈련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책망했다. 며느리는 불쌍한 애를 그렇게 혼내면 안 된다고, 둘이 자주 다투었다. 아들이 손자의 병원 왕래와 치료에 더 애쓰지 않는다고, 섭섭하다고 했다. 아들은 공부 중이었다. 아들은 공부도 힘들고, 공부 끝난 뒤에 알바까지 하고 오면, 자기도 지친다고 화를 내었다. 심하게 싸우면, 사돈댁까지 다 같이 가서 서로를 이해시켜야 했다.
나는 ‘왜 그리 결혼도, 임신도 일찍 해서 이 고생이냐.’는 원망이 생겼다. 남편은 그러기에 결혼은 안된다 했는데, 이렇게 속을 썩인다고, 짜증을 내었다. 모두가 힘들고 지쳤다. 그래도 손자는 놓을 수가 없는 병든 자식이었다. 손자는 서로 원망하지 말고, 다 힘을 합쳐서, 나를 잘 키워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착하고 밝은 아이였다.
뇌성장애도 아니고, 아직도 병명을 정확하게 모른다고 한다. 균형을 잃으니, 점점 걷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휠체어에 많이 의존하고, 눈도 심히 나쁘고, 여전히 흔들린다. 외국의 학교는 학생 복지가 훨씬 좋았다. 개인 보조 선생님이 늘 옆에 있어서, 화장실 가는 것과 등하교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 차별이 없었다. 장애가 있어도 늘 정상 수업을 듣게 했다. 무대에 경연할 때도 늘 같이 참여하게 했다. 하지 마비와 고도 근시 외에, 지능은 정상이었다. 그러나 의료치료는 거의 없었다. 수영훈련 정도였다. 다리는 점점 굳어져 갔다. 그래서 방학 때마다 한국에 와서, 몇 달 입원하고, 고가의 마사지 치료를 받았다. 날마다 아이를 돌보는 며느리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몇 백의 생활비와 치료비를 주는 나도 힘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국의 학교로 왔다. 한국은 19세 이하의 장애 학생은 부모의 책임이었다. 휠체어 학생은 일반 수업을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보조 선생님이 개인 별로 없으니, 화장실 가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 특수반에 들어가게 했다. 지적장애와 뇌병변 장애 학생의 등급은 천차만별이다. 공부가 아니라, 겨우 한글을 깨치고, 노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일상생활 처리에 시간이 많이 들었다. 고심 끝에, 다행히 좋은 대안 학교를 찾아 들어갔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손자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 주었다. 서로 화장실에 데려가려고 했다. 학비는 비싸지만, 그것이 내가 일하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누구 부럽지 않던 아들과 정말 예쁘고 곱게 자란 며느리는 이런 세파를 견디며, 마음이 많이 낮아졌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인생을 내려놓았다. 도리어 세상의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동시에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둘째인 귀여운 손녀딸은 오빠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늘 챙겨준다.
너무 공부시키지 말라고 하는데도, 손자는 늘 1등을 한단다. 나는 공부에 애쓰지 말라고 계속 말한다. 세상이 얼마나 치열하고 매정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공부 잘하는데 나중에 직업을 못 가지면, 상처받지 않을까 미리 염려한다. 손자는 그림을 잘 그린다. 나는 그림이나 그리면서 유유자적하고 살라고 말한다. 손자를 통해, 인생은 성공을 위해, 자신을 끝없이 채찍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운다. 대충 살면서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인생은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기 위해 내가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돌보는 것이, 나의 남은 일이라고 다짐해 본다.
앞으로도 힘든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장애아가 세상에 있는 이유는, 서로 아픔을 보듬으며 살라는 확성기라고 한다. 그리고 신은 누구에게 그 아이를 맡겨야 할까, 하고 찾다가, 가장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게 맡긴다고 한다. ‘그래, 아들 내외야, 손자가 균형을 못 잡아 넘어지듯이, 우리도 가끔 넘어질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이 아이를 키우며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이 도리어 세상 고통을 껴안을 수 있는 넉넉한 품새가 되었지 않니.’
‘그리고 착하고 밝은 손자야, 자랄수록 부딪히게 될 여러 차별과 고통을 잘 건너가기를 바라. 너를 위해 우리가 달무리처럼 곁에서 보호해 줄게. 가는 길이 비록 어둡더라도, 당당해지려무나. 누구와 경쟁하지도 말고, 주어진 인생을 그냥 즐기고 놀다 가려무나. 그래도 괜찮아, 세상을 사는 방식은 여러 가지거든. 언제나 힘을 내, 우리가 너의 인생의 휠체어를 끝까지 밀어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