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놓은 엄마를 놓으며
엄마에게 갔다. 93세인 엄마는 4개월 전부터 요양병원에 계신다. 엄마는 36세에 이혼을 당하여, 혼자 살아왔다. 살기 위해 이것저것을 했지만, 한 직업에 정착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이모 집에 얹혀살았다. 삼촌과 이모들은 교수, 의사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나름의 자존심이 있는 엄마가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세상은 또 얼마나 수군대며 매도했을까
엄마 나이 60세에, 나는 용기를 내었다. 그토록 만나지 말라 하던 아버지의 명령을 어겼다. 어떻게 친엄마를 버리겠냐고 항변하며, 가까이 모셔왔다. 작은 아파트를 구해서 입주하는 날, 엄마 눈에 눈물이 흘렀다. 아파트 근처 텃밭도 가꾸고, 상추 고추 등을 갖다 주시고, 우리 집에 자주 왕래하면서 지냈다. 엄마는 아직도 소녀 감성이 있고, 노랗고 빨간색 옷을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했다. 예쁜 스카프, 브로치, 손수건, 예쁜 그릇 등을 자주 사다 주었다.
그러나 오래 혼자 살아서 그런지, 매사에 의심이 많았다. 어디 가서, 내가 가방을 그냥 두면, 꼭 자신 옆에 두고 지키면서, 사람들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많은 것을 모으는 성격이었다. 몇 년이 지난 세금고지서, 몇 년이 지난 병원 처방전, 또 온갖 쇼핑백에, 비닐, 일회용 용품들까지 넘치고 넘쳤다. “왜 이리 필요 없는 것을 모아두세요?”라고 물으면, 엄마는 “언젠가 조사 나올 수도 있다.” 하며 버리지 말라고 했다. 또 여기저기 온갖 잡동사니 등을 죽 늘어놓고 있었다. 좀 집어넣으라고 하면, 그렇게 눈에 보여야 안심이 된다고 했다. 편집증까지 아니어도, 불안 심리가 있었다.
할머니 밑에서, 매사에 불안, 불안하게 살던 습성 때문일까. 뭔가를 찾으면, 곧장 대령해야 하는 호된 시집살이의 여파일까. 바람을 피우던 아버지에 대한 끝없는 의심이 굳어졌을까. 누가 자기를 책망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늘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짜증이 났다.
그래도 엄마는 아파트에서 부녀회장도 하고, 경로당 재무도 보았다. 자식들 자랑도 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돈 계산이 헷갈리는 것을 보았다. 집에 갔더니, 온갖 물건들이 다 나와 있고, 냉장고에는 반찬들이 꽉 찼고, 상해 있었다. 바퀴벌레가 얼마나 많은지, 징그러웠다. 다른 집에서 온 것이라고, 남의 탓을 했다. 모아둔 많은 짐은 정리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퇴근하여, 남편과 딸 내외와 함께 짐을 정리하는데, 몇 날이 걸렸다. 100L 대형 봉투 20개에 담아, 버리고 또 버렸다.
이제는 혼자 사실 수 없는데, 모실 사람이 없었다. 엄마가 이혼할 당시, 나는 12살, 막내는 5살이니, 동생들은 엄마에 대한 기억 자체가 희미하다고 했다. 그리고 동생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엄마를 보았으니, 엄마에 대한 정도 없었다. 며느리들은 엄두도 못 내었다. 새엄마에게 오래 시달렸으니, 부탁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여동생은 외국에 살았다. 엄마는 장녀인 내 몫이었다. 내 나이도 60이 가깝고, 아이 셋을 키우며 노심초사하다가 다 출가하고, 이제 좀 쉬나 싶었는데, 치매가 온 엄마를 모시게 되었다.
엄마는 치매 등급을 받아, 주간 보호센터를 다녔다. 처음엔 내가 어디 아프냐며 안 간다고 하시더니, 점차 재미를 붙이셨다. 약을 챙겨 드셔도, 단기기억은 점점 잃어갔다. 어제 일을 기억 못 하더니, 점점 오전 일을 기억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전 일, 학창 시절에 공부 잘했고, 운동도 잘해서 인기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다행인 것은 아버지 이야기를 거의 안 하셨다. 아버지에 대해 한이 맺힌 하소연을 많이 하였는데, 그 기억도 잊었다. 어떤 날은 밤중에 일어나, “누가 이렇게 소리 지르냐”라고 고함을 치신 적도 있다. 꿈이라고 해도, 아니라고 몇 시간을 완강히 고집을 부리셨다. 어느 날은 남편에게 “자네가 왜 나를 싫어하냐고” 싸움을 걸었다.
때때로 센터에서, 소변을 실수했으니 기저귀 팬티를 꼭 입혀 보내시라고 해도, 그것은 절대 안 하셨다. 때문에, 매일 팬티를 손으로 빨아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목욕을 시켜 드렸지만, 언제나 옷에는 각질이 하얗게 묻어 나왔다. 세탁 전에 각질을 일일이 털어내는 일이 정말 힘이 들었다. 다시 다 내 코로 들어왔다. 분명히 약을 드리고, 바로 앞에서 입으로 넣었는데, 방에 가 보면 약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었다. 남편은 “그렇게 먹기 싫어하는 약을, 왜 매일 챙기면서, 실랑이를 하느냐?”라고 짜증을 내었다. 남편의 불편과 짜증이 이해되면서도, 치매 속도를 늦추어야 하는 딸의 마음을 어찌 알까 하는, 원망도 생겼다.
기억을 못 해도, 순간의 즐거움을 누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 자체가 귀했다. 우리도 시간이 지나면 잊는데, 엄마는 좀 더 빨리 잊는다는 것일 뿐이었다. 외국도 갔다 오고, 좋은 축제와 공연을 많이 갔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엄마를 모시고 같이 가야 하는 것이, 남편에게 미안했다. 남편과 단둘이 1박 여행도 갈 수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직접적으로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센터에서는 돌아가면서 다 회장을 하는데, 엄마가 회장직이 끝났는데도, “내가 회장인데, 조용히 해!”하면서 큰소리로 호통을 쳐서 난감하다고 했다.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못했던 삶의 마지막 외침 같았다. “이제 회장이 아니니, 사람들 혼내면 안 된다.”라고 했더니, 아니 회장 사진이 딱 붙어 있는데, 내가 회장이라고 했다. 사진을 떼어내자, 조용해지셨다. 코로나를 두 번이나 앓아서 폐렴이 왔는데도 잘 버티셨다. 늘 자신은 아픈 데가 없다고 하셨다. 기분 나쁜 기억, 아픈 것도 다 잊고, 현재만 사는 엄마였다.
그런 세월이 10년이 지났다. 나도 나이가 70이 되었다. 서서히 엄마를 모시는 것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목욕도, 빨래도, 식사도, 어디를 가든, 늘 모시고 가야 하는 것도 힘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장애가 있기에, 살림 살며, 일하는 것도, 무리라고 느끼는데, 이제는 엄마를 모시는 것이 짐이 되었다. 나의 이기심이 보이며, 한계인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엄마가 화장실에서 넘어지셨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며, 악! 외마디 소리를 지르셨다. 고 관절에 금이 갔다. 나의 이기심이 벌을 받는 것 같아, 미안하고 속상해서, 며칠을 잠을 설쳤다. 급하게 수술을 하고, 재활 치료를 했지만,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었다.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다. 수술과 재활치료비가 천만 원이 넘었다. 동생들과 서로 나누어 감당했다.
엄마는 계속 병원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얼마간은 어떤 요양병원이 좋은가를 고민했다. 알고 보니, 요양병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담당 간병인이 정말 중요했다. 올케는 간병인이 잘 돌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어디에 간들, 상황은 같았다. 처음 엄마를 병문안 갔을 때, 눈물이 났다. 엄마는 “왜 내가 여기 있냐고 집에 가자.”라고 했다. 엄마는 고 관절 수술을 한 것조차, 잊어버렸다. 걸어야 집에 올 수 있다고 했더니, 열심히 걷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싫어하던 기저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몸에서 냄새가 나서, 간병인에게 자주 목욕을 부탁했지만, 모시고 나올 수는 없었다. 나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어느 날, 본인이 아픈 줄 모르시고, 밤에 화장실 가려고 내려오시다가 넘어지셨다. 우리뿐 아니라, 병원에서도 난리가 났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 그 후로 병원에서는, 밤에는 잠결에 내려오지 못하게, 장갑을 채워야겠다고 했다. 좌우로 몸부림은 칠 수 있다고 했다. 엄마를 밤에 묶는다는데도, 모시고 나올 수는 없었다.
명절이 되어, 1박 휴가를 내어 집으로 오셨다. 손자들은 누군지 모르셨어도, 아들들은 기억하셨다. 하루를 모시는 데도 화장실 가는 일은 큰일이었다. 간병인에게 무엇을 더 부탁할 할 염치도 없었다. 간병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병원으로 모셔 드리는데, 이번에는 말없이 들어가셨다. 그게 더 슬펐다. 돌아오며,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자위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부모를 떠맡긴 못된 불효를 탓하고 있었다.
이제 서서히 엄마도 병원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크로켓과 햄버거를 사 들고 가면, “맛있다, 맛있다” 하시면서 다 드셨다. 그리고 “너는 안 아프나”라고 걱정하셨다. 치매가 심해져도, 자식 걱정은 아직 놓지 않았다. 6인실밖에 없어서, 간병인이 세밀히 못 돌본다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같이 계신 치매 할머니들과 잘 지내고 계셨다. 어떤 날은 몇 시간을 노래를 부르신다고 했다. 스스로 재미를 찾으시는 엄마가 도리어 안쓰러웠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내 나이가 어때서”였다.
엄마는 어릴 적 대청마루에 누워있는 내게 가르쳐준,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같이 불렀다. 엄마는 지금 나와 함께 놀았던 그 대청마루에 살고 있다. 어린 나를 바라보며, 산 위에서 부는 바람, 고마운 바람이라고, 나직이 불렀다. 내게 고맙다고 했다. 나는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다. 나는 고마운 바람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노랗고 빨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 엄마와 단풍을 보러 오던 그 길이었다. 외롭지만 소녀같이 고왔고, 노랗고 빨간색을 좋아하던 엄마의 모습이 단풍에 겹쳐졌다. 단풍잎은 아직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어두운 길 뒤로 엄마를 두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