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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Jul 29. 2022

바라는 게 뭐예요

'인디아일' 공식 포스터(출처: 네이버)


최근 ‘인디아일 (In the aisles)이라는 영화를 봤다. 2018년에 개봉된 독일 영화다.


‘외로운 마음들이 모이는 곳’. 노란 지게차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 영화 포스터가 호기심과 감성을 자극한다.


주인공 크리스티안은 이제 막 창고형 마트에 취업한 청년이다. 야간 조에 배치되어 늦은 오후에 출근해, 막차가 운행되는 캄캄한 밤에 퇴근한다. 그에게 맡겨진 업무는 음료를 진열하는 일이다.

음료 구역에는 브루노라는 베테랑 선임이 있는데, 브루노는 처음에 크리스티안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기대하는 바가 없다는 듯 시종일관 심드렁한 태도로 크리스티안을 대했는데, 아마도 여기저기 문신이 보이는 크리스티안이 미덥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묵묵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크리스티안을 보며 브루노는 마음을 열었고, 크리스티안이 마트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옆에서 잘 끌어 주었다.      


영화는 마트에서 시작해 마트에서 끝이 난다. 특히 손님이 모두 퇴장한 밤의 마트가 영화의 주 배경이다. 크리스티안과 동료들은 매대 앞에서 또는 매대와 매대 사이 통로에서 부지런히 물건을 옮기고 진열하며 다음 날 영업을 위해 늦은 밤까지 노동을 이어간다. 마트에서 물건을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건 지게차인데, 이 영화에서 노란 지게차는 주인공만큼 자주 등장한다. 지게차를 얼마나 능숙하게 운전하는지를 보면 대충 경력을 짐작할 수 있다. 선배 브루노는 크리스티안에게 지게차 작동법을 전수한다. 처음 크리스티안이 높은 선반에 있는 맥주 상자를 지게차로 내릴 때 맥주병들이 크리스티안의 머리 위로 와장창 쏟아질 것만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듬직한 선배 브루노 덕분에 크리스티안은 점차 안정적으로 지게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 마트는 나에게 그냥 마트일 뿐이었다. 비비고 왕교자 만두를 살까, 풀무원 얇은 피 만두를 살까 신중히 고민하고, 동물복지 무항생제 달걀을 살까, 그냥 무항생제 달걀을 살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곳. 오직 나와 우리 가족이 먹고 마시고 써야 할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곳.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노동을, 어떤 조건에서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과도하게 많은 종류의 상품들이 경쟁적으로 진열되어 있고, 내가 가는 시간엔 대체로 늘 사람으로 붐비고, 어떤 물건이 가격이나 품질면에서 내게 적당한지 끊임없이 따져야 하는, 그래서 되도록 가고 싶지 않은 곳(특히 주말엔 더더욱), 마트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건 마트엔 상품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너무 당연해서 두 번 말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이전엔 보지 못했다.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걸.     


그런데 과연 마트뿐일까. 한 달 전 가족 여행으로 다녀왔던 강원도의 어느 리조트 1층 화장실. 볼일을 보기 위해 들른 화장실 맨 오른쪽 청소도구들을 보관하는 칸에 사람이 있었다. 무언가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쳤다. 전용 비치까지 소유한 대형 리조트에 청소 노동자 한 사람 쉴 공간이 없는 건가 잠깐 멈춰 생각해 보지 않았다. 봤으면서 못 본 척하고, 알면서 모르는 척 넘어갔다. 생각해보니 그런 순간들이 너무 많다.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택배와 배달 주문이 급격히 늘어나며, 플랫폼 노동자들의 불안하고 위험한 노동 현실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해 여름, 나는 이 문제에 관한 연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한 배달 노동자의 인터뷰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사람들은 내가 가면 음식이 왔다고 생각하지, 사람이 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반짝반짝 깨끗하고, 보기 좋게 정돈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편리한 것들 속엔 언제나 누군가의 노동이 숨어 있다. 그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형광펜으로 밑줄 긋고 별 세 개 그려 넣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새겨 넣고 싶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노동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붕어빵 기계로 찍어내듯 매일 똑같은 모양으로 반복되는 마트 노동자의 일상 속에도 분명 짧지만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매대에 물건을 진열하며 주고받는 농담 속에서, 15분 쉬는 시간에 두는 체스 한판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퇴근 카드를 찍으며 수고했다 주고받는 인사 가운데 서로를 향한 격려와 연민, 우정, 동료에 대한 예의가 깃들어 있다. 그런 것들의 힘으로 무채색처럼 보이는 하루를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게 아닐까.     


“바라는 게 뭐예요? 이루어진다면요.”     


크리스티안이 첫눈에 호감을 느낀 사탕류 담당 마리온에게 물었다. 마리온이 대답했다.    

  

“전부요.”     


만약 누군가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리고 정말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


내가 바라는 건, 어디서나 사람이 우선인 세상. 모든 사람의 노동 현장이 안전하고, 효율성과 가성비가 아닌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세상. 위험하고 고된 노동 현장의 사람들이 존중받고, 합당한 대가를 받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본사 직원과 하청 직원 상관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어디서나 적용되는, 모든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으로 보호받는 세상. 그래서 더는 1 m³ 좁은 철창 안에 사람이 한 달 넘게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이대로는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외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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