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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Apr 21. 2022

침대에 누워 낯선 이들을 떠올리던, 2022년의 봄

코로나19 확진 기록

[Web발신]

귀하는 코로나19 확진으로 감염병 예방법 제41조 및 제43조에 따른 격리 대상임을 통지하며

귀하의 동거인이 10일간 준수해야 할 권고사항을 안내하오니 본 문자를 공유 바랍니다.     

격리 대상자: 확진자 신은경

격리기간: 2022.03.06. ~ 03.11. (24:00)

격리 장소: 자택      


신속항원검사 후 서서히 드러나는 두 줄




2022년 봄을 알리는 첫 소식은 코로나19 확진 통보였다.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3월 1일 화요일 부모님과 점심을 먹었는데 시아버지가 목요일 오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으셨다. 소식을 듣자마자 온 가족이 신속 항원검사를 했고, 다행히 모두 음성으로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금요일부터 몸이 으슬으슬 춥더니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을 먹었지만, 오한은 점점 더 심해졌다. 토요일 아침 다시 한번 신속 항원검사를 해보니 양성 결과가 나왔다. 서둘러 인근 선별진료소에 갔다. 뉴스에서 익히 본 대로 아침부터 PCR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3월이지만 강풍 특보까지 내려 한겨울처럼 추운 날이었다. 허둥지둥 나오느라 날씨 확인을 하지 못해 하필 얇은 코트를 입고 나온 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강풍은 사정없이 사방에서 불어 제치는데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어딘지 불안하고 아파 보이는 사람들이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며 고난의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 시간이 마치 고문처럼 고통스러웠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PCR 검사를 받았다. 코를 찔리는 일이 처음도 아닌데 여전히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날은 이제라도 순서가 되어 무사히 코를 찔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남편과 아이도 동거인으로 함께 검사를 받았다. 다음 날 예상대로 나는 확진 통보를 받았고, 남편과 아이는 다행히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잠복기가 있다고 하니 두고 봐야 했지만 일단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먼저 격리 생활을 경험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시간문제라고 했다. 아무리 힘들게 격리를 하며 옮기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결국 바이러스는 옮겨지고, 늦게 옮겨질수록 격리기간만 더 길어져 고달파지니 집 안에서는 평소대로 편하게 지내라는 것이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조언들을 듣고 알겠다고 했지만, 막상 평소와 똑같이 생활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 코로나 예방 교육을 철저히 받은 아이는 KF94 마스크를 쓴 내가 거실에 나오기만 하면 입을 손으로 가리며 후다닥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편도 나와 거리 두기를 하며 내가 쓴 모든 식기를 살균 소독하고 연신 소독제를 뿌려댔다. 차라리 잘됐네. 편하게 방콕을 하며 아픈 내 몸만 돌보자 생각했다. 그날부터 나는 철저히 거리 두기를 하는 동거인들 덕분에 본격적으로 앓아누울 수 있었다.     



오한과 근육통, 인후통이 종합세트처럼 몸을 점령했다. 침대에 누워 남편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하루 세 번 약을 챙겨 먹었다. 잘 먹고 잘 쉬어야 낫는다고 해서 말 그대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그 위에서 먹고 마시고 잤다. 흡사 1인 병실에 입원한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가격리를 하면 책은 원 없이 읽겠구나 싶었는데 책을 펴는 것도 귀찮았다. 유튜브에서 <유 퀴즈 온 더 블록>과 <인간극장>을 보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 밥상이 들어왔다. 이틀 정도 지나자 오한과 근육통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인후통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말을 할 때는 물론이고 침을 삼킬 때조차 통증으로 괴로웠다. 목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스프레이를 뿌리고 따뜻한 물을 수시로 마셨지만,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조금 나아졌다가,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아프기를 반복했다. 인생 최악의 인후통이었다. 마치 성대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아팠는데,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침을 삼키면 번쩍하는 고통이 급습했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이 괴로움은 오래지 않아 곧 끝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침대와 합체가 되어 주야장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격리 이틀째 날에 우연히 기사 하나를 봤다. ‘카밀라(KAMILA)’. 또박또박 손글씨로 적은 종이를 들고 한 남자가 어두운 국경선을 밤보다 더 어두운 표정을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사진 아래로 비슷한 표정을 한 사람들의 사진들이 보였다. 모두 폴란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서 초조하게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검문소 쉼터 작은 난로 곁에 추위를 피해 여러 사람이 웅크려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누워서 보고 있자니, 뜻 모를 죄책감이 느껴졌다. 몸이 아픈 건 누구에게 미안할 일도, 부끄러울 일도 아니지만 어쩐지 미안하고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몸을 바로 세우고 앉아 찬찬히 기사 내용을 다시 읽어보았다.      

출처: 한겨레 신문 2022.03.07.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통증은 얼마나 갈까. 길어야 일주일 정도면 사라지겠지.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비극은 언제 끝이 날까. 사람들의 황망함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 안전하고 아늑한 침대에 누워 필요한 약과 음식을 먹으며 통증의 정도를 가늠하고 있는 내가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나그네가 되어 국경을 넘고, 언제 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슬픔과 절망을 알 턱이 없다. 아픔의 크기와 강도를 비교하며 누구의 아픔이 더 크고 치명적인지 순위를 매길 수 없겠지만 그들의 고통에 비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고통’이란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것이었다. 내내 침대에 눌어붙어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워, 아프다고 징징대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건 이제 그만하자 생각했다.




 통증이 옅어질 때쯤에야 방 밖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격리 기간에 남편은 확진자를 돌보는 동거인으로서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끼니때면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간 다양한 음식들을 차려 주었고, 약과 함께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수시로 채워 주었다. 그리고 내가 마음 편하게 아플 수 있도록 아이를 빈틈없이 돌봤다. 마음 같아서는 신랑을 와락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내 옆에 이런 고마운 사람이 있어 감사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얼마 전 60대 어르신이 양성 판정을 받고 혼자 집에서 격리하던 중 사망했다는 뉴스 기사가 떠올랐다. 전파력이 강한 오미크론 바이러스로 최근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정부는 재택치료와 자가 치료로 대처방법을 변경했지만, 그 안에 혼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인터넷 사용이 자유로운 사람들은 핸드폰만 있으면 필요한 생필품을 언제든 주문할 수 있지만, 혼자 사는 고령자나 장애인에겐 재택 격리와 자가 치료는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홀로 죽어간 사람들 생각에 또다시 느슨해진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지금도 어디선가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지. 약을 사다 줄 친구나 가족은 있는지 려되었다.


나아지지 않을 것 같던 통증은 나흘째 되던 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신기해서 괜히 침을 꿀꺽꿀꺽 삼켜 보았다. 아픈 몸이 회복되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격리기간이 끝나면 마음껏 동네를 쏘다니며 오래오래 걷고 싶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 마스크를 벗고 거리를 걸을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3년째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낯설다.      




아픔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돌아보게 한다. 매일 반복되던 일상이 멈추고, 몸이 보내오는 통증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에 비로소 타인의 아픔이 보이고, 그 사람의 처지와 고통의 실체를 가늠해 보게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게 가져다준 몸의 통증과 일상의 멈춤은 인간의 욕심에서 시작된 전쟁의 고통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벌여진 비극을 바라보게 했다. 어쩌면 회복은 나와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겪은 크고 작은 아픔들은 좋은 거름이 되어 나를 더 단단하게 자라게 할 것이다. 오미크론 바이러스의 침투로 느닷없이 앓아누웠던 2022년의 봄에 나는 수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만 너무 편하게 있는 것 같아 미안했고, 당장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또 미안했다. 그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들은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이정표가 되었다. 아무도 외로움 속에 홀로 죽지 않게, 서로 돌보고 돌봄 받으며, 어깨를 기대어 살아가는 세상을 여전히 꿈꾼다. 그런 세상을 위해 티끌만 한 기여라도 하고 싶다. 읽고 사유하고 쓰고 말하는 동시에 눈을 더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봐야겠다. 작은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놓치지 않으려면.

     

까만 밤처럼 어두운 얼굴로 국경선을 바라보고 서 있던 사람들은 기다리던 이들을 만났을까. 부디 너무 늦지 않게 서로를 찾아 부둥켜안을 수 있기를. 하루빨리 부서진 그들의 일상이 다시 회복되기를. 마른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듯 봄처럼 다시 일어나길. 잠시 눈을 감고 간절히 바라본다.     



참고자료: 한겨레 기사 [현장] 이름 못 찾을라…우크라 국경의 밤, 밝은 ‘이름표’의 기다림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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