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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Apr 22. 2022

오늘 뭐 먹지

초보 집밥러의 일기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사랑해도 아니고, 고마워도 아니다. 매일같이 열심히 서로 주고받는 말은 바로 "오늘 뭐 먹지?"이다.


1년 넘게 간헐적 단식을 하고 있는 신랑은 아침엔 두유나 오트밀 음료만 간단히 먹는다. 점심은 회사에서 먹고 오니 오늘 뭘 먹을지는 주로 저녁 메뉴에 관한 이야기다.

 



결혼하고 내내 맞벌이를 유지했다. 그러다 얼마 전 내가 돌연 퇴사를 한 뒤, 우리는 처음으로 외벌이 가정을 경험하고 있다. 가계 수입이 급격히 줄어드니, 당연히 지출을 줄일 방법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중 생활비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식비를 줄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먹는 것엔 어른에서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진심인 편이라 식비 절감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블로그를 찾아다니며 식비 줄이는 방법에 대해 알아봤다. 외식과 배달음식을 줄이고, 냉장고의 음식 재료 상황을 확인하고, 계획을 세워 마트에 가라는 것.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블로그에서 소개한 하루 1만 원으로 식비를 제한하는 것을 따라 해 보기도 했지만, 물가가 워낙 많이 올라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체험단에 선정되면 매달 다양한 음식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는 글도 봤지만, 선뜻 도전해 보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기본이자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외식과 배달음식을 과감히 줄이고, 가능한 집에서 해 먹는 것으로.

 

수시로 냉장고를 들여다보며 재고를 확인했다. 마트에 가기 전 어떤 음식을 먹을지 미리 정하고, 필요한 재료만 구입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예전엔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냉장고를 꼼꼼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마트에 가면 당장 해 먹지도 않을 음식들을 충동적으로 카트에 쓸어 담았고,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가 미어터질 듯 사 온 음식들을 밀어 넣는 걸 반복했다. 당연히 버리는 음식들이 상당했다.

 

외벌이가 된 후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가벼워진 냉장고와 다양해진 집밥 메뉴들이다. 이젠 누가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물으면,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변화이다. 여건이 달라지니, 자연스럽게 생활 습관도 달라지고 있다.

 



4월의 어느 월요일 오후. 나는 어김없이 저녁에 뭘 먹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주말에 샤부샤부를 해 먹고 남은 소고기 한 덩이가 냉동실에 있었다. 느타리버섯도 한주먹 남아있고. 2주 전 어머니가 보내주신 무생채는 아직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야채칸엔 지난주 마트에서 구입한 콩나물도 보였다.

  

‘좋아. 오늘 저녁은 비빔밥이야.’

 

비빔밥만으론 뭔가 좀 아쉬운 것 같아 물냉면을 곁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초록 채소가 없네. 시금치를 사 올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하다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다. 오이무침을 하려고 사 둔 오이가 보였다. 비빔밥과 오이무침이라. 나쁘진 않지만, 비빔밥에 시큼한 식초 맛이 나는 건 역시 별로라는 생각을 하다 문득 언젠가 먹어본 적 있던 오이 볶음이 떠올랐다. ‘오이를 볶는 게 맞나?’ 의심이 들어 바로 인터넷을 열어 검색해 보니, 인플루언스들이 올려 둔 오이 볶음 황금 레시피가 후루룩 쏟아졌다. 오이를 10분 정도 소금에 절인 뒤, 물기를 짜서 기름에 약 2분간 볶으면 아삭아삭 고소한 오이 볶음이 완성된다고 했다.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니, 오늘은 색다르게 오이 볶음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필요한 재료들을 주방 테이블에 모두 올려놓고, 세척해야 할 재료들을 차례대로 물에 깨끗이 씻어 그릇에 담았다. 그 뒤 도마를 꺼내, 향이 강하지 않은 재료들부터 썰고 다듬었다. 오이는 간격을 맞춰 동그랗게 썰었는데 오이 볶음을 하기에 두꺼운지, 얇은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일단 느낌대로 썩썩 썰어 나갔다. 그러다 냉면에도 오이를 조금 올리는 게 좋겠다 싶어 마지막 4분의 1쯤은 채를 썰어 따로 담아 놓았다. 동그랗게 썬 오이를 큰 볼에 담고 소금을 골고루 뿌렸다.

 

오이에 소금이 간간히 배어드는 사이 콩나물을 씻고 쪽파를 총총 썰어 콩나물 볶음을 만들 준비를 했다. 다진 마늘도 넣으면 좋지만, 마늘을 다지는 게 귀찮으니 오늘은 과감히 생략. 예전엔 콩나물은 무조건 끓는 물에 데쳐 무침으로만 먹었는데, 얼마 전 요리책에서 콩나물 볶음을 본 뒤로는 무침보다 볶음을 자주 하게 된다. 요리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 콩나물을 데치는 것이 의외로 간단하지 않다. 어떤 날은 비릿한 냄새가 없이 잘 데쳐졌지만, 또 어떤 날은 훅하고 콩비린내가 났다. 좀 더 쉬운 방법을 택하는 게 요리를 지속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무침 대신 볶음을 선택했다. 생각보다 볶을 때 기름을 많이 두르지 않아도 되어 느끼하지 않았고, 고소한 맛은 더해졌다.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고춧가루와 소금을 넣은 뒤, 콩비린내가 나지 않을 때까지 연신 콩나물을 뒤적이며 볶았다. 잘 볶아진 콩나물을 용기에 담고 참기름을 한 스푼 둘러주니 맛있는 콩나물 볶음이 완성됐다.

다음엔 느타리버섯을 집어 개수대로 가져갔다. 밑동을 조금 자르고, 뭉쳐있는 버섯을 하나씩 떼어 물에 여러 번 흔들어 씻었다.  

 

그 사이 오이는 소금에 적당히 절여졌다. 면포에 오이를 넣어 싼 뒤, 두 손에 쥐고 꼭 짰다. 물기를 뺀 오이를 느타리버섯과 함께 커다란 웍에 넣고 볶았다. 너무 많이 볶으면 오이가 물러진다고 해 시간을 확인하며 빠르게 볶았다. 간장을 조금 추가해 슴슴하게 간을 하고 접시에 담았다. 깨소금을 뿌리니 제법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오이를 좀 더 얇게 썰었어야 했다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먹는 걸로.

 

이제 소고기를 볶을 차례. 샤부샤부용 얇은 소고기는 다른 재료들을 준비하는 사이 스르르 녹아 있었다. 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파와 함께 휘리릭 볶은 뒤 접시에 담았다. 비빔밥에 넣을 거니 작게 잘라야겠다 생각하고 가위를 들어 싹둑싹둑.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다 되었다. 달걀프라이를 할 차례다. 기름을 두른 팬을 10초 정도 예열한 뒤, 달걀 세 개를 한꺼번에 터뜨려 넣고 노른자가 익기 전에 불을 껐다. 다른 재료들에 간이 되어있고, 고추장을 넣고 비빌 거니 달걀프라이에는 일부러 간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냉면을 준비하기 전엔 신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의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면을 삶을 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사이 면을 손으로 비벼 풀어 두었다. 모든 면 요리가 그렇듯 냉면 역시 면을 너무 짧게 삶거나, 오래 삶으면 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제품 포장지에 나온 대로 딱 40초만 삶기 위해 타이머를 맞췄다.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보고 면을 넣은 뒤 냄비 바닥에 달라붙지 않도록 휘저었다. 40초가 지난 뒤 재빠르게 불을 끄고 찬물에 면을 씻었다. 찬물 샤워로 말끔해진 면을 삼등분해 하얀 도자기 그릇에 담았다. 살얼음이 낀 냉면 육수를 면 위에 붓고, 얼마 전 엄마가 담가주신 동치미 국물도 한 국자 추가했다. 미리 썰어둔 오이를 올리다, 아침에 먹다 남은 사과 반쪽이 떠올라 얼른 가져와 껍질을 벗기고 채 썰어 오이와 함께 올렸다. 마지막으로 톡 쏘는 매운 겨자소스까지 올려주니 냉면도 완성. 마침 도어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스 타이밍.

 

테이블을 행주로 깨끗이 닦고, 재료들을 하나씩 옮겼다. 오이 버섯볶음, 무생채, 콩나물 볶음, 소고기, 달걀프라이, 고추장, 참기름, 커다란 볼, 동치미 물냉면, 덜어먹을 접시와 수저, 젓가락. 냉장고에 넣어 둔 시원한 물과 컵까지 올려두니 드디어 저녁 먹을 준비가 끝이 났다.

 

들어올 때부터 배가 고프다고 외치던 신랑은 손만 겨우 씻고 나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빔밥 제조에 들어갔다. 준비된 재료들을 큰 볼에 쏟아붓고 사정없이 비비기 시작했다. 맛있게 빨개지는 비빔밥을 바라보며 침이 고였다. 참지 못하고 물냉면을 먼저 한 입 먹었다.

 

"너무 맛있다."

 

첫 번째 탄성. 먹음직스럽게 비벼진 비빔밥도 입안 가득 넣어 씹으니, 매콤하고 달콤하고 고소한 맛들이 한데 모여 최고의 맛을 냈다.

 

"진짜 맛있다."

 

두 번째 탄성. 역시 비빔밥을 하길 잘했어. 셀프 칭찬을 하며 남편과 아이를 바라보니, 역시 열정적으로 먹고 있다.

 

뭘 먹을지 노트에 적어보며 다양하게 궁리^^

 

처음엔 단순히 식비 절감을 이유로 시작한 요리지만 이젠 점점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잘 차려진 밥상 속에 담겨있는 누군가의 노동과 마음씀에 대해.

그래서인지 요즘 집밥을 할 때마다 자주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는 어떻게 생색 한 번 내지 않고 이런 노동을 매일같이 반복했을까. 어릴 적엔 집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아침저녁이면 어김없이 '뚝딱' 차려지는 밥상과 점심 도시락을 보며 특별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마의 손맛'이나 '엄마의 집밥'처럼  손발 노동이 엄마와 여자들의 것으로 인식되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정작 나는 엄마의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 수고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았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직접 요리를 하게 되면서 비로소 매일 차려지는 밥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그냥 '뚝딱'하고 나오는 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년에 신랑이 1년간 육아휴직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전담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언제나 잘 차려진 뜨끈한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날은 제육볶음과 쌈채소, 어떤 날은 가지 덮밥과 된장찌개, 어떤 날은 김치찌개와 달걀말이. 누가 봐도 정성이 들어간 그런 밥을 먹을 때마다,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말로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이 반찬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환대를 준비한다. 엄마와 신랑에게 받은 환대를 이제 내가 베풀 차례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밥상이 고단한 하루의 즐거움이 되길, 위로가 되길, 응원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추신: 아무리 긴축재정이고, 집밥이 좋다 해도 금요일 최고의 환대는 뭐니 뭐니 해도 치킨입니다.


각자 취향대로 싸 먹는 김밥 재료 준비~~
떡볶이는 사랑입니다.
처음으로 도전해 본 장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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