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흔적들에 대하여 1.
“어른들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야” 그렇다면 나는 내내 착한 어린이였다. 그러니까 바른생활 교과서에서 배웠던 대로 쓰레기는 꼭 쓰레기통에만 버리고,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 하는 어린이가 착한 어린이라면 나는 착한 어린이였음이 분명했다. 내가 쓰레기통을 찾아 온종일 손바닥이 하얘질 때까지 껌종이를 꼭 쥐고 다니는 어린이였고. 학교 앞 신호등 샌드위치 트럭 아저씨와 6년간 매일 인사했던 유일한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어른이가 되어서도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어른이가 착한 어른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법이 좋았다. 어른들이 정해준대로,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정해준 대로만 하면 나는 생각 할 필요도 없이 착한 어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착한 어른이가 되는 일이 이렇게 쉬운데 왜 어떤 사람들은 나쁜 어른이 되는 것일까?
그것이 그 즈음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래서 법대에 진학했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정해준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처벌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이 필요했다. 나쁜 사람들을 통제하고 처벌해 모든 사람들이 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착한 사람만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법대생으로 들었던 첫 수업의 그 장면을 지금 당장이라도 그려낼 수 있다. 불을 다 꺼서 어두운 강의실 강의 자료를 띄운 빔프로젝터의 상은 앞 창문으로 들어온 빛 때문에 흐릿했다. 나는 교수님 단상 바로 옆, 맨 앞자리에 앉아서 세 시간 내내 헌법 전문을 읽었다. 이 장면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내가 착한 어른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어린이였기 때문에 착한 어른이가 될 수 없었다.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헌법 전문은 우리나라 최고법인 헌법에서 헌법조문보다 더 앞에 나오는 공포문이다. 헌법 제정의 과정, 목적, 지도이념과 원리 등을 규정하는 이 헌법전문은 법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문장이다. 그런데 이 헌법전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법에 저항해왔고, 저항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지배에 저항했던 3·1운동으로 세워진 정권을 계승하고, 부정한 정권에 저항했던 4·19혁명의 이념을 계승한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은 옳지 않은 법에는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학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바로 법에 저항하는 법이다. 이후 짧지 않은 시간 법에 저항하는 법, 국가 권력의 행사에 저항하는 법 등의 ‘저항권’을 배운다. 헌법 전문을 읽고 받았던 충격이 나에게 남긴 첫 흔적은 “말을 잘 듣기만 하는 어른은 착한 어른이 아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착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생각과 판단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선택으로 착한 어른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어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나쁜 어른이 될 수밖에 없다. 착한 어른이 되기 위해 스스로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으려면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충실하게 ‘어른들의 말을 잘 듣기’만 해왔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듣기, 말하기, 쓰기를 그렇게 오래 배워왔는데 지금까지 스스로 내 생각을 ‘말하기’를 해 본 적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