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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허가청구, 친생부인허가청구가 필요한 경우

‘전남편 아이’로 기록된 아기… 출생신고 앞에 선 벽

by 오경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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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민법 개정의 배경


2015년 4월 30일, 헌법재판소는 민법 제844조 제2항 중 ‘혼인관계 종료의 날부터 300일 내에 출생한 자’ 부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2013헌마623). 이는 오랜 시간 동안 논란이 되어온 ‘친생자 추정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이후 2017년, 해당 조항은 개정되었고, 친생추정을 보다 유연하게 번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대표적인 규정이 바로 민법 제854조의2의 친생부인의 허가청구제도와 제855조의2의 인지허가심판청구 제도입니다.

이 개정은 과거의 사건에도 소급 적용되지만, 이미 판결로 확정된 친생자관계에 대해서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한 가족의 사연: 현실에서 마주한 법의 벽


서울 마포구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김성우 씨(가명, 36세)는 5년 전 이혼의 아픔을 겪은 후, 지난해 새로운 배우자인 이현주 씨(가명)를 만났습니다. 이 씨 역시 오랜 별거 끝에 이혼을 준비 중이었지만, 전남편의 비협조로 법적 절차가 지연됐습니다. 그렇게 지체되는 사이,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고, 아이는 이혼 신고가 정식으로 이뤄지기 전인 ‘300일’ 이내에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출생신고를 위해 찾은 주민센터에서 두 사람은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민법상 ‘혼인 중 또는 혼인 종료 300일 이내 출생한 자녀’는 전남편의 자녀로 추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이는 현 남편 김성우 씨의 자녀가 아닌, 전남편의 자녀로 기록될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출생신고를 위한 길: 친생추정 번복 절차


이처럼 아이를 생물학적 아버지인 김성우 씨 자녀로 신고하기 위해선 법적으로 ‘친생추정’을 뒤집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방법이 바로 “친생부인의 허가심판청구” 또는 “인지허가심판청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이미 전남편의 자녀로 출생신고가 된 경우라면, 위 심판청구 절차는 사용할 수 없고, 민법 개정 전처럼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해야 합니다. 이 경우 전남편이 직접 소송 당사자가 됩니다. 반면, 출생신고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면, 현 남편(생부)은 가사비송사건으로 분류되는 인지허가심판청구를 할 수 있습니다.


법적 절차의 실무적 장벽


인지허가청구는 상대방이 없는 비송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청구인(생부)과 사건본인(자녀)만이 당사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법원이 ‘이해관계인’의 참여를 재량에 따라 허용한다는 점입니다. 이론상 임의적이지만, 실무에서는 마치 필수처럼 전남편에게 의견청취서를 송달하는 관행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혼인관계가 이미 파탄 난 지 오래고, 서로 연락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남편에게 아이 존재를 알리는 건 사실상 고통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분쟁이나 폭력 사태로까지 번지는 일이 있어, 이러한 실무 관행은 오히려 당사자와 아이 모두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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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의 정보 요구와 그 해결책


심판청구서에는 전남편 인적사항을 기재하지 않아도 되지만, 법원은 전남편과의 혼인관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본, 기본증명서 등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서류들을 현 부부가 직접 발급할 수 없다는 점인데, 이런 경우 법원에 ‘보정’ 신청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보하게 됩니다.


허가를 위한 핵심 요건: 유전자 검사


친생관계를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유전자 검사 결과입니다. 민법 제855조의2 제2항은 과학적 검사 결과나 장기간의 별거 등 특수한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허가 여부를 판단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무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전문 기관의 유전자 검사 성적서를 요구하며, 일부 법원은 검사기관 선정과 의견청취 절차를 연계해 진행합니다. 지역에 따라 방식이 달라 전문가 조력이 필수적입니다.


절차상 주의점: 개인정보와 동의서


인지허가청구가 인용될 경우, 심판문에는 아이 어머니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야 하므로, 심판청구서에 어머니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이 포함돼야 합니다. 일부 법원은 어머니의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가 첨부된 동의서까지 요구합니다.


재판부에 설득이 필요한 순간


간혹 생부가 인지허가청구를 하면 당연히 전남편에게 통보된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해관계인의 참여는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므로, 만약 전남편에게 알려질 경우 심각한 문제가 예상된다면, 반드시 사전에 재판부에 그 사정을 소명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실제로 일부 사건에서는 폭력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습니다.

재판부가 모든 사정을 미리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사전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계획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응입니다.


법이 바뀌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어렵다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민법 개정은 한 걸음 나아간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절차는 여전히 낯설고 복잡하며, 무엇보다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가장 보호받아야 할 시기인 출생 직후, 아이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 제도 운영의 개선 또한 필요해 보입니다. 제도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법의 문턱은 지금보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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