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생관계 부존재 상황에서 ‘인지청구의 소’가 갖는 의미와 한계
혼인하지 않은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법에서는 혼외자(婚外子)라고 부릅니다. 혼인 중 출생자는 출생만으로 아버지와 법률상 친자관계가 성립하지만, 혼외자는 어머니와의 관계만 인정되고, 아버지와는 법적 연결이 단절된 상태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스스로 이를 인정(인지)하거나, 법원의 판결로 인지가 확정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은 서로 법적으로 '남'인 겁니다.
이처럼 혼외자에게는 반드시 ‘인지(認知)’라는 절차가 필요한데요. 친생추정(혼인 중 출생자에게 자동으로 부여되는 법적 친자관계)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유전적 관계는 자연의 섭리에 속하지만, 법적 관계는 오로지 ‘인지’라는 인위적 절차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겁니다.
인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임의인지(任意認知)입니다. 친아버지가 스스로 '이 아이는 내 자식이다'라고 신고하는 절차죠. 이는 가족관계등록부에 인지신고서를 제출하면 효력이 발생하며, 그 즉시 친자관계가 법적으로 인정됩니다.
둘째는 강제인지(强制認知)입니다. 즉, 친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인지하지 않을 때, 자녀나 그 직계비속(손자녀 등)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강제로 인지하도록 청구하는 절차입니다. 이를 인지청구의 소라고 부릅니다. 인지청구의 소는 단순히 '아버지 이름을 기록하고 싶다'는 감정적 요청이 아니라, 자녀의 신분질서를 바로잡고, 나아가 상속권·부양권·가족관계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유진(38세, 직장인) 씨는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유진 씨의 친부와 교제했지만, 가정사와 현실적 이유로 혼인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유진 씨의 출생신고는 어머니 단독으로 이루어졌고, 그의 가족관계등록부에는 ‘부(父)’란이 공란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통해 친부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생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내게도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법률 상담을 통해 인지청구의 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상태. 그렇다면 유진 씨는 ‘죽은’ 아버지를 상대로 인지청구를 할 수 있을까요?
민법 제863조, 제864조는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민법 제863조 생부가 그 출생자를 인지하지 아니한 경우, 그 출생자·직계비속 또는 법정대리인은
생부가 생존 중에는 그를 상대로, 사망한 후에는 사망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검사를 상대로 인지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즉, 생부가 이미 사망했다면 ‘검사(檢事)’를 상대방으로 지정해 소송을 제기해야 합니다. 이는 사망한 사람을 직접 상대로 할 수 없으므로, 국가가 법정대리인처럼 절차를 대리하는 구조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김유진 씨처럼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경우에도 사후 인지청구가 가능하며, 판결이 확정되면 인지의 효력은 출생 시로 소급됩니다. 즉, 뒤늦게라도 법적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자녀였던 것'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인지청구의 소에는 제척기간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효(소멸시효)가 아니라, 기한이 지나면 아예 청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절대적 기간을 의미합니다.
민법 제864조는 ‘생부 사망 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개정 전 규정상 1년이었는데, 대법원은 1977년 판례(77므7 판결)에서 이를 보다 합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안 날’이란 단순히 생부의 사망 사실을 들은 시점이 아니라, 자녀가 그 사실을 인식하고 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성년자가 아버지의 사망 사실을 들었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어 ‘인지청구’를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는 제척기간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죠. 이는 자녀의 권리를 보다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판례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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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청구의 소가 인용되어 확정되면, 자녀는 출생 당시로 소급하여 친자로서 지위를 인정받습니다(민법 제865조). 이는 단순한 서류상의 이름 추가가 아니라, 법률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효력을 가집니다.
생부가 살아 있다면, 자녀는 인지 확정 시점부터가 아니라 출생 시점부터 부양청구권을 가집니다. 이에 따라 과거양육비·장래양육비 청구가 가능해집니다.
사례처럼 인지 시점에 이미 생부가 사망한 경우, 자녀는 출생 시로 소급된 상속인 지위를 취득합니다. 즉, 인지 판결이 확정되면 이미 종료된 상속절차에도 가액반환청구권(상속분 가액지급청구)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건데요. 상속재산분할이 완료된 상태라면 그 결과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속인들로부터 자신 몫에 해당하는 금전적 보상을 청구하는 방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인지 판결이 확정되면, 그 자녀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생부 이름이 기재되고, 부 계열 가족관계등록부에도 자녀가 ‘자(子)’로 등재됩니다. 이로써 비로소 법적 부자관계가 완결되는 것입니다.
관할 법원
생부가 살아 있을 때는 생부 주소지 관할 법원, 사망 시에는 사망 당시 최후주소지 관할 가정법원입니다.
피고의 지정
생존 시에는 생부, 사망 시에는 검사(檢事)가 피고가 됩니다.
증거의 중요성
유전자 검사 결과, 가족·지인 진술서, 과거 사진·통신 기록 등 친자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간접 증거가 핵심입니다. 실무상 유전자 검사가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보시면 되는데요. 생부가 사망했다면, 생부의 부모나 형제 등 직계혈족의 DNA를 통한 간접검사(부계 확인)로도 입증이 가능합니다.
기초자료 확보의 시기
인지청구의 소는 보통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제기되는 경우가 많아 증거 확보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담 단계부터 증거 수집 전략을 함께 세워야 합니다.
인지확정 판결
→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신청(법원 또는 구청)
상속분 가액지급청구(필요시)
→ 다른 상속인 상대 민사소송 제기
부양·양육비 청구(생존 시)
→ 가사비송 또는 조정절차로 병행 가능
이 과정에서 여러 법률관계가 중첩되므로, 전문 변호사의 단계별 전략이 필수입니다. 특히 상속권을 포함하는 경우는 인지 판결 확정 후 상속등기 정정, 금융기관 거래 해지, 예금 환급 등 2차적인 행정절차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만큼 전문가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봐야 합니다.
혼외자는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 중 자녀’와 달리 법적으로 출발선이 다르다는 현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인지청구의 소는 단순한 서류 정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닫혀 있던 문을 뒤늦게 열어 ‘나의 법적 뿌리’를 되찾는 절차라고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비록 친부가 세상을 떠난 뒤라도, 법은 여전히 그 연결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다만 그 문을 여는 시기와 방식, 그리고 증거의 준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증거도 희미해지고, 제척기간이라는 벽도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체 없이 전문가와 상의해 인지청구 절차를 준비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한 개인의 법적 정체성과 가족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는 사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