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과 3대 수업이 뭔지 알아?” 기계과 저학년 학생들에게는 한 가지 통과의례가 있었는데, 그건 선배들의 프로젝트 수업 고생담을 듣는 것이었다. “야, 내가 진짜 1학년 때 기제(기계 제도)랑 2학년 때 창공(창의 공학 설계)하면서 얼마나 밤을 새웠는지 아냐? 근데 있잖아, 그건 끝판왕 설제(설계 제조 및 실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3학년 때 설제를 듣고 나야 너희들도 진정한 기계과 사람이 되는 거다. 알았냐?” 몇 년에 걸친 세뇌 덕분에 2007년, 3학년을 시작하는 나는, 설제라는 수업에 대한 두려움과 약간의 설렘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설제를 가르치셨던 김종원 교수님은 수년간 기업체에 계시다가 교수 생활을 시작한 분이셔서 그런지,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너희들이 원하는 사람들하고만 일 할 수 있는 게 아니야”라고 하시며, 한 학기 동안 동고동락할 프로젝트 팀원들을 랜덤으로 배정하셨다. 그리고 팀원들끼리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라고, 첫 번째 과제로 세상에서 아무도 안 해봤을 일을 팀원끼리 함께 수행한 후 5분 간 발표하도록 하셨다.
“저희 팀은 가오리 연을 날렸습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한 팀의 발표가 기억난다. 처음에는 가오리 연을 날린 게 뭐 대수인가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팀은 문구점에서 파는 연이 아니라 수산물 시장에서 파는 말린 가오리로 연을 만들어 날렸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연을 잡고 전력질주도 해보고 자전거를 타고 날려보기도 했는데, 도무지 가오리가 떠오를 생각을 안 하더라구요.” 일반적인 연보다 훨씬 무거운 말린 가오리는 웬만한 속도가 아니고서는 띄울 수가 없었고, 그들은 결국 오토바이에 가오리를 묶고 달려서 연을 날리는 데 성공했다. ‘와… 뭐야, 완전 대박인데?’ 그 교수에 그 제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스브레이킹이 끝나고 메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30만 원의 예산을 가지고 파이프 탐사로봇을 만드는 것이었다. 수직으로 세워둔 직경 30cm의 대형 파이프 안을 올라갈 수 있는 로봇을 만들어, 파이프 내부 어딘가에 미리 심어둔 사각형 이미지를 카메라로 찍고 3m 지점에 빨리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출발 후 시간을 재서 결승점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팀이 1등이다. 간단하지? 단, 사진 속에 사각형 타겟이 완벽하게 담기지 않으면 내려가서 다시 찍고 와야 돼. 각 팀은 팀장 뽑아서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시작하고, 3주 후에 설계 아이디어 정리해서 10분씩 발표하도록 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만들기를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이론을 잘 아는 학생을 넘어 실전 로봇 엔지니어로서의 나를 시험해보고 싶어서 스스로 팀장을 자처했다. “제가 팀장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팀원 6명 중에 절반은 선배들이었지만, 워낙 빡세기로 소문난 수업에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다들 반기는 눈치였다. “오, 막내가 패기가 좋네. 그래, 진원이 중심으로 한 번 잘해보자!”
설계가 시작되자 우리는 먼저 로봇의 컨셉을 잡기 시작했다. “아무리 파이프 안을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고 해도, 타겟 이미지를 찾는데 우왕좌왕하면 시간을 다 까먹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 팀은 예산의 일부를 카메라 각도 조정 메커니즘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면 같은 위치에서 카메라를 위아래로 움직여 더 넓은 면적을 촬영할 수 있으니, 타겟을 찾기 쉬울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이 팀은 미션을 체계적으로 잘 분석했네. 잘할 거 같은데?” 교수님은 색다른 전략을 가지고 나온 우리의 발표를 좋아하셨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우리는 신이 나서 곧장 로봇 제작에 돌입했다. '우리도 1, 2학년 때 기제, 창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인데, 설제도 사실 별거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하니 설제는 차원이 달랐다. 파이프 탐사 로봇은 디테일이 조금만 부족해도 로봇이 파이프에서 떨어져 망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설계 과정에서부터 엄청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게다가 기본 부품들을 제공해 줬던 1, 2학년 수업과는 달리, 설제는 구로 공구 상가에 여러 번 방문하여 모터에서부터 스프링까지 필요한 부품들을 직접 구매해야 했다. 그제야 귀가 따갑게 들었던 선배들의 말이 이해가 됐다. “와, 이래서 설제가 기계과 끝판왕이라고 했던 거구나…”
최종 테스트를 1주일 남기고, 우리 팀은 15개 팀 중 최초로 파이프 탐사 미션에 성공했다. “와… 올라간다, 올라가!” 지난 몇 달 동안 매일 자정까지 남아 작업실에서 흘린 땀방울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뻤던 건 우리의 전략이 통했다는 것이다. “오, 진짜 카메라 각도 조정하니까 타겟을 쉽게 찾네?” 우리의 테스트를 지켜보던 다른 팀들은 카메라의 각도를 바꿔가며 쉽게 타겟을 찾는 우리 로봇을 보고, 웅성웅성 거리며 자신들의 작업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최종 테스트까지 남은 1주일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막판 스퍼트를 한 다른 팀들이 하나 둘 미션을 성공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팀원들을 보며 “그래도 쟤네들은 카메라 각도 조정 없이 타겟을 찾느라고 시간을 많이 까먹을 거예요"라고 하며 안심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한국인의 손기술이었다. 많은 팀들이 피나는 연습 끝에 로봇 조작 기술을 터득해, 빠른 속도로 올라가다가 타겟이 있는 곳에 단 번에 멈춰 섰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팀들은 강력한 모터를 사용하는 것에 예산을 집중했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아… 어떡하지? 이 상태라면 중간 성적도 못 내겠는데…’ 최종 테스트가 가까워 오는데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로봇이 완성된 상태에서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방법은, 기존 모터를 더 강력한 모터로 교체하는 수밖에 없었다. 편법으로 사비를 들여 더 좋은 모터를 사서 몰래 교체하는 게 가능하긴 했지만, 그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가장 먼저 미션을 성공한 우리는, 무기력하게 다른 팀들이 우리를 앞질러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최종 테스트에서 우리는 15개 팀 중에 9등을 기록했고, 결국 B- 학점을 받았다.
B-라니… 1, 2학년 동안 항상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던 내게 처음으로 받은 B학점은, 그 자체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게다가 호기롭게 팀장으로 자원했던 사람으로서 좋지 못한 성적을 낸 것이 다른 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바로 엔지니어로서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우리 로봇이 다른 팀보다 더 느렸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 중심에는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카메라 각도 조정 메커니즘”이 있었다. 아이디어 자체는 신선했고 교수님께 좋은 평가도 받았지만, 실전에서는 불필요한 악세사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 나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 로봇을 만드는 엔지니어로서는 자격미달인가? 단지 필기시험만 잘 보는 범생이에 불과한 건가?’ 그렇게 끝판왕 설제는, 이후 몇 년간 나를 괴롭힐 질문을 안겨주었다.
‘내 실력은 진짜인가? 진짜란 도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