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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n 13. 2023

삶의 정거장에서

7. 대전 현충원 부모님 묘지를 다녀와서

대전 현충원 부모님 묘지를 다녀와서


 2023년도 어느덧 절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세월이 유수(流水)라지만, 빨라도 너무 빠르다. 나이가 들면, 하염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속도가 체감 속도를 훌쩍 뛰어넘는 것을 알고는 깜짝깜짝 놀란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질 리 없는 시간인데, 환갑을 넘긴 요즘 들어 유독 시곗바늘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24시간이, 일주일이, 한 달이 성큼성큼 줄행랑을 치는 느낌이 자주 와닿아 그때마다 인생이 다 이런 건가, 하는 상념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나이가 들수록, 일상적인 시간관념이 현실의 시간을 따라잡지 못한 데서 비롯된 심리적인 자각 현상 때문일 것이다. 에너지가 충만하고 활기가 넘치는 젊은 시절에는 활동량과 활동폭이 왕성하고 넓어 심리적인 시간이 현실의 시간보다 빠르게 돌아간다. 반면, 체력이 떨어지고 행동반경이 줄어드는 노년기로 접어들면 활동량과 활동폭이 하강 곡선을 그리게 돼, 심리적인 시간이 현실의 시간을 따라잡지 못한다.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에구, 왜 이리 시간이 빠르누, 나도 이제 늙었나 봐,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아닐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요의(尿意)에 잠을 깼다가도 이내 잠들어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는데, 요 며칠 새 그 리듬이 깨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나흘 전에 그런 일이 한 번 있어 컨디션 탓으로 돌렸는데, 오늘 새벽 똑같은 현상이 반복돼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대전 현충원으로 가는 내내 몸이 무거웠다. 한두 시간 뒤척이다가 다시 잠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예 뜬 눈으로 아침을 맞기라도 하는 날이면 머리가 띵하고 하루 종일 정신적인 진공 상태가 계속돼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더구나 나는 예전부터 다음 날 오전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전날 밤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혹여 늦잠이라도 자 일을 그르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조바심을 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마다 현충일 전후로 집사람과 함께 대전 현충원을 다녀오곤 했는데, 이번처럼 정신이 맑지 못한 상태로 부모님 앞에 선 건 처음이었다. 올해는 6월 8일, 목요일을 추모일로 잡았다. 잠든 지 2시간 만에 깨 그 후로 해 뜰 때까지 깨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모호하게 뒤척이다 일어나니 눈꺼풀이 아래로 쳐지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이나 다름없는 컨디션 난조를 뒤로 하고 일찍 채비를 서둘렀다. 13년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아 이제는 루틴이 된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을 마치고 주 1회 돌아오는 분리수거를 처리한 다음에 간단하게 끼니까지 때우고 나도 여유가 있었다.     


 이번 대전행에는 딸도 따라나섰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 발령 대기 중인 딸은 할머니를 기리는 마음이 옆에서 보기에도 기특해, 생전에 손녀를 유달리 예뻐한 할머니의 진심이 고스란히 감정이입이라도 된 것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딸은 피치 못 할 사정이 없는 한 해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를 찾아 정성껏 예를 올리곤 한다. 


딸과 할머니 사이에는 예사롭지 않은 사연이 하나 있다. 딸은 큰일을 앞두고, 꼭 할머니께 소원을 비는 습관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일이 술술 풀려 우리 모두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결과라고 고마워한다. 우연도 한 번이지, 자꾸 반복되면 결코 스쳐 지나가는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게 인지상정이다. 우연에 신뢰의 끈이 조여지면 그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고 알게 모르게 그것에 의지하게 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이런 신뢰는 용기와 자신감으로 이어져 정신적인 자산이 될 수 있기에 가볍게 볼 문제만은 아니다.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행신역에서 출발하는 대전행 KTX를 타고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잠이 들었다. 서울역에 잠시 정차해 18호차까지 승객들을 가득 태운 열차는 천안아산역과 오송역을 거쳐 목적지 대전역에 도착했다. 



시간이 정오(正午) 경이라 대전역사 안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근처에 맛집으로 유명한 칼국수 전문점이 있다는 집사람의 제안으로 그리로 갔다. 칼국수에 수육, 감자전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먼저 식탁에 올라온 김치의 빛깔이 먹음직스럽게 고왔다. 칼국수와 김치는 찰떡궁합, 칼국수 맛은 김치를 보면 안다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으며 매콤하게 톡 쏘는 맛과 아삭아삭한 식감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주문한 메뉴 중 감자전이 가장 빨리 등장했는데, 메인 음식에 앞서 입맛을 돋우는 데는 그만이었다. 메뉴에 적힌 대로 100% 곱게 간 감자만 사용해 노릇노릇하게 구운 감자전은 심심하고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풍미(風味)가 감자다웠다.


부드럽게 잘 삶긴 수육이 고춧가루에 버무린 부추와 함께 식탁에 올려지자 곧이어 칼국수가 나왔다. 딸은 수육을 특히 좋아하는데, 먹는 모습을 보는 나도 군침이 돌았다. 이 집의 간판 메뉴인 칼국수는 국물이 칼칼해 중독성이 느껴졌고, 바지락 조갯살을 씹을 때 부드럽고 싱그러운 맛이 혀에 착착 감겨 먹는 내내 입이 즐거웠다.     


 칼국수와 수육으로 채워진 더부룩한 포만감에 커피가 당겨 테이크아웃 포장 주문을 할까, 하다가 검색으로 찾아낸 수제 커피 맛집에 들어갔다. 빈티지풍 실내장식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소품과 안락한 의자, 널따란 공간 배치가 마음에 들었다. 메뉴판도 흥미로웠다. 종류별 커피 이름이 적혀 있고, 뜨겁고 차갑게 내리는 방식에 더해 강한 맛, 중간 맛, 약한 맛 등 취향대로 주문할 수 있었다. 


주인 혼자서 주문받고 커피를 내리고 서빙까지 하는 집이었는데, 수제 방식이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지루함이 있었으나 손색없는 커피 맛이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오랜만에 아늑한 분위기에서 수제 커피의 풍미를 만끽해서인지 가라앉은 컨디션이 되살아났다.     


 호출한 콜택시를 타고 30여 분을 달려 대전 현충원에 도착했다. 평일이라 한적했다. 정문 입구를 가로질러 언덕배기 오른편에 새로 지은 매점 건물에서 늘 하던 대로 조화(造花)와 소주, 북어포, 일회용 알루미늄 접시를 사서 묘지로 향했다. 광활한 산자락에 드넓게 탁 트인 묘역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헤아릴 수없이 많은 묫자리 중에서 부모님 비석을 찾기 위해서는 묘비번호가 꼭 필요했다. 15303.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모님 묘 앞에 돗자리를 깔고 조화를 교체하고 단출하게 준비해 간 음식을 차렸다. 음식이라고 해봐야 사과 하나, 떡, 북어포가 전부다. 초창기에는 이것저것 제법 모양을 갖춰 격식을 차렸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간편한 방식으로 바꿨다. 물티슈로 비석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닦고 소주 한 잔을 올린 다음 차례대로 돌아가며 두 번씩 절을 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2002년의 이곳 풍경은 지금과 달랐다. 그때만 하더라도 묘역 옆으로 연못이 나 있고, 그 아래 잔디밭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작은 정자(亭子)도 있었다. 그곳에 가족끼리 모여 앉아 고인을 기리는 담소도 나누고 예를 올리고 남은 음식도 나눠 먹고 했었다. 


이제는 정자 자리에 새로운 묘역이 들어섰고, 잔디밭에 앉아 쉬는 가족들 모습도 사라진 지 오래다. 부모님 묘지 위쪽으로 천안함 46 용사 묘역이 있고, 그 위의 산 중턱 너머까지도 묘역으로 빼곡히 단장돼 빈자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부모님 묘를 찾아가는 시간은 짧지 않지만, 부모님 묘에 머무르는 시간은 짧다. 6 • 25 참전 용사인 아버지는 2002년 12월에, 어머니는 2014년 8월 이곳에 묻혔다. 30분 남짓 부모님 곁을 지킨 다음 대전역으로 가는 콜택시에 올랐다.      


 부모님 묘소를 다녀오고 나면 못다 한 숙제를 끝낸 것처럼, 개운하고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삶에 활기를 얻는다. 묘지 참배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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