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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l 03. 2023

삶의 정거장에서

8. 6년 만의 온 가족 여행 ①가족 여행 1일 차

가족 여행을 맞아     

 

 네 식구가 모두 참가한 가족 여행은 실로 오랜만이다. 마지막 온 가족 여행은 6년 전 이맘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송추계곡에서 보낸 1박 2일 나들이였다. 그동안 딸과 집사람, 나 셋은 거제도 가고, 통영도 가고, 대전도 가고, 제주도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아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홀로 서울에 남았다. 이번 가족 여행을 맞는 감회가 새삼 새로운 이유다.


천성이 자유인이라, 웬만해서는 가족 여행길은 물론 가족 외식에도 나서길 꺼리는 아들이 웬일인지 이번에는 흔쾌히 동참할 뜻을 내 비췄다. 뒤늦게 철들었다, 하기에는 소견머리가 멀쩡해 어울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는 데에는 아들의 자유분방한 독고다이 기질 탓이 클 것이다.


아들은 나를 닮아 자기주장이 강하고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초지일관 밀어붙이는 외골수 스타일이다. 그러면서도 자기애(自己愛)가 강해 남에게 좀처럼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점은 나를 닮지 않았다. 첫인상을 포착하는 눈썰미가 남다르다고 자부하는 나는 일단 한 번 마음의 빗장을 풀면 불가근불가원의 규범적 인간관계 법칙을 빠른 속도로 뛰어넘는 편이다.


숙소 바로 앞 사천 포구 너머 방파제와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망망대해가 보인다. 왼쪽에서 뻗은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오른쪽 방파제 위에 하얀 등대 2개가 서 있다.      


그것은 분명 남보다 빠르게 끈끈한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신뢰의 도로에 묵시적으로 용인되는 제한속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탓인지, 일방통행의 후유증 탓인지 상대의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 언행에 적잖이 실망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역시 사람 속마음은 알 수가 없고,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옛 어른들의 충고를 흘려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경험하는 마음의 생채기일수록 생살을 도려내듯 아리고 쓰리다. 그런 아픔을 몇 번 겪고 나면 불가근불가원의 법칙을 힐끔거릴 만도 한데, 타고난 기질은 어쩔 수 없는지, 나의 대인관계 성향은 요지부동이다. 정(情)을 주는 조건이 까다로운 대신 일단 신뢰의 도로로 접어들면 쾌속 질주하는 나만의 대인관계 법칙을 나는 여전히 지지한다.


이제 와 노선을 갈아탄다는 것도 우습고, 그러기에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괜히 용만 쓸 뿐이라는 생각에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정주행 스타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 가끔 원치 않는 생채기가 메아리로 돌아오는 바람에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그 몇 배로 나를 나답게 이끌어온 고마운 기질이다.     


 이번 가족 여행지는 동해안의 대표적인 관광지 강릉이었다. 2박 3일 코스로 레지던스 호텔을 숙소로 정한 가운데 KTX~렌터카로 이어지는 우리 가족 나들이 교통편의 관행을 깨고 내가 직접 승용차를 몰았다. 여행 날짜가 휴가철이 아닌 비수기 주중이라 도로 정체의 위험성이 낮은 데다 집에서 강릉까지 거리가 240여 km에 예상 소요 시간이 3시간 남짓이라 이번에는 흔쾌히 자가운전을 선택했다. 4인 가족 왕복 KTX 운임의 부담을 덜고, 렌터카 비용까지 아낄 수 있다며 자가운전의 장점을 강조한 집사람의 의견도 내 결정에 한몫했다.      


 나에게 이번 여행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또 있다. 며칠 전 입사 발령 대기 중인 딸이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한 데다 아들도 이번 여행이 끝나자마자 출근한 회계법인 근처에 자기만의 둥지를 터 부모 곁을 떠났다. 한꺼번에 아들딸 둘 다 집을 떠나 들이닥칠 빈자리의 허전함을 선제적으로 달래고, 동해(東海) 먼바다로 떨어지는 낙조(落照)를 감상하면서 석양 반주(飯酒)의 감흥에 올라타 잊고 있었던 가족의 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오차범위를 넘어서다 말기를 반복하는 일기예보는 이번에도 예외 없이 심술을 부렸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리라는 주간 예보는 출발 하루 전, 내일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안면을 싹 바꿨다. 설상가상 우리 가족의 2박 3일을 책임질 강릉 날씨는 출발일과 다음날 이틀 연속 비,라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예보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했다.          


숙소 거실 통창 바깥으로 사천 바다가 펼쳐져 있다.



가족 여행 1일 차 2023621()     


#비 내리는 여행 첫날     

 예보대로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늘을 보니 비가 금방 갤 것 같지는 않았다. 서울은 오후부터 개고, 강릉은 오후까지 비가 계속 이어진다는 예보를 뒤로 하고 오전 10시 35분 집을 나섰다. 식구 수대로 긴 우산 4개를 자동차 트렁크에 넣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강릉이 아닌 한성대입구역. 닷새 전 근처 오피스텔에 방을 구해 홀로서기에 나선 딸을 픽업하기 위해서였다.


통행한 지 너무 오래돼 기억이 가물가물한 내부 순환도로를 지나 동소문동 대로변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오전 11시 40분, 딸이 미리 방문객 등록을 해 놓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9층 중앙에 자리한 딸의 방은 전용 7.5평 크기였다. 대로변 뒤 이면도로 뷰로 채광도 양호하고 아늑하면서 조용한 분위기라 딸이 홀로 지내기에 편안해 보였다.


옷장과 사물함, 신발장 등 수납공간이 일렬 붙박이장으로 배치된 모습이 질서 정연했다. 창가 블라인드를 걷으면 저 멀리 북악산이 보였다. 오피스텔 인근에 꽤 알려진 어탕 맛집이 있다길래 그곳에서 점심 끼니를 때우고 오후 1시 무렵 강릉으로 떠났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석양 무렵의 안목 해변. 500m에 이르는 백사장과 커피 거리로 소문난 곳이다.


#강릉으로 가는 길      

 평일 낮이라 강릉으로 가는 길은 대체로 무난했다. 북부간선도로에서 구리 I. C. 방면을 지날 때 약간의 체증(滯症)이 있었을 뿐, 특별한 정체 스트레스가 없었다. 실시간 교통안내 앱이 이끄는 대로 편안하게 몸을 맡기면서 힐끗힐끗 바라본 바깥 풍경은 20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올림픽대로와 팔당대교, 춘천 방면 이정표를 지나 서울양양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총연장 144km의 서울양양고속도로는 일부 제한속도에 못 미쳤을 뿐, 고속도로다웠다. 제한속도 단속 카메라가 없는 구간에서 차들은 속력을 냈다. 나도 모르게 과속의 유혹에 흔들렸다. 규정대로라면 84분이 걸릴 거리를 10분 정도 빨리 통과했다.


오랜만에 경험한 고속도로 운전의 스릴감이었다. 한편으로는 달콤한 스릴감 뒤에 도사리고 있을 고속주행의 또 다른 얼굴, 섬뜩함이 떠올라 평정심(平靜心)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운전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생각났다. ‘최고급 드라이브 기술은 방어운전, 안전 운전이다’.      


 목적지까지 8부 능선을 넘자 나도, 다른 가족도 만면(滿面)에 화색(和色)이 돌았다. 27km에 이르는 동해고속도로를 스치듯 지나쳐 강원도 국도로 접어들었다. 주문진~강릉 방면 이정표가 뒤로 밀려나자 해안로가 나왔다. 한 5km를 달렸을까, 저 앞에 다소 이색적인 외관의 27층짜리 고층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왼 손목에 찬 시곗바늘이 오후 4시 10분을 가리켰다. 숙소는 사천(沙川) 해변을 지척(咫尺)에 두고 있었다. 아까부터 비는 내리고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비는 이슬비였다. 바다 저 너머 희뿌연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객실 발코니에서 일출을 볼 수 있는 숙소

 아들과 딸이 머리를 맞대 선택한 숙소는 지은 지 얼마 안 된 리조트 형 최신 레지던스 호텔이었다. 우리가 예약한 객실은 침실 3개, 거실, 화장실 2개, 주방, 발코니로 구성된 바다 전망 패밀리 룸이었다. 가구와 일부 기기들이 건물 내장형 방식으로 꾸며진 가운데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안락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의 시설이 꼼꼼하게 갖춰져 있었다.


큰방과 작은 방에는 더블 침대가, 또 다른 작은 방에는 두꺼운 매트리스가 놓여있었다. 거실에는 55인치 대형 IPTV와 소파, 탁자, 시스템 에어컨, 수납장 등이 공간 친화적으로 디스플레이 돼 있었다. 냉방 보조기기로 이동형 선풍기 2대도 붙박이장 안에 따로 준비됐다. 주방 시설 중 인상적이었던 건 얼음 제조기능이 장착된 냉온수 정수기와 와인 냉장고였다.


안목 해변 백사장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빨간 우체통. 실제로 편지를 부치고 받을 수 있는 기능도 있다.


바로 앞에 사천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테라스는 크기도 크기지만 푹신한 안락의자 2개와 보조 탁자까지 비치돼 있어 실용성이 돋보였다. 해 질 무렵과 해 뜬 후, 테라스에서 눈에 들어온 바다 경치가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워 첫날과 이튿날, 마지막 날까지 순차적으로 핸드폰 카메라 사진 앨범에 저장했다. 이른 아침, 테라스에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일출 광경은 아쉽게도 놓쳤다. 늦잠이 원인이었다.     


 6년 만에 스스럼없이 가족 여행에 합류한 아들이 나를 놀라게 한 사실은 또 있다. 숙박비가 만만찮은 숙소 비용 일체를 아들이 결제했다는 것이다. 집사람에게서 그 말을 들은 나는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면서 속으로는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올 초 회계법인에서 파트타임 회계사로 2개월 단기 근무한 대가로 받은 월급 일부를 아껴 이번 여행 경비로 쾌척한 셈인데,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준 가족을 위하는 마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고즈넉한 사천 해변 풍경과 아리송한 등대 3

 숙소 앞 도로, 사천면 사천진리(沙川津里) 진리항구길을 품고 있는 사천 해변은 조용했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처럼 밀려오는 파도 소리만 귓전을 때릴 뿐, 바닷가 마을은 한적했다. 어촌마을 사천진리의 어항(漁港)은 1종 어항이다. 생선이 풍부해 어장이 발달 돼 있고, 개펄 호수로 유명한 인근의 경포(鏡浦)와 한 묶음으로 이어져 피서철 관광지로도 인기가 높다. 한여름 이곳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다를 것으로 짐작되는 이유다.


고기잡이용 소형 낚싯배들이 줄지어 정박한 포구(浦口)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가운데 방파제 위의 빨간 등대(燈臺)가 애써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옆 방파제 위에도 하얀 등대 2개가 사람들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어엿하게 서 있었다.


첫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등대들을 나는 진짜 등대로 믿었다. 비가 오락가락한 바닷가 날씨 탓에 시야 확보의 정확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등대를 등대 아닌 것으로 여기기에는 사천 해변의 분위기가 너무 순진했다. 밤이 되자 등대는 내가 생각한 그 등대가 아니었다. 포구로 들어오는 어선들의 항해 생명줄이자 등대의 존재 이유인 등불이 보이지 않았다. 포구는 어두웠고, 밤바다는 더 어두웠다.      


 다음 날 아침 테라스에서 다시 등대를 바라봤다. 어젯밤 본 등불 없는 등대라는 선입견 탓인지, 크기나 생김새가 등대 같지 않고 관광객들을 위한 조형물로 보였다. 깜빡 속았네, 라며 내심 실망한 나는 집사람과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는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온 뒤 여행 후기 자료를 정리하던 중 등대 관련 메모가 눈에 띄어 내 판단대로 기록하려다가 아무래도 찜찜해 사실확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천면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더니 소관부서가 강릉시청 해양수산과,라고 알려주었다. 담당자에게 문의한 결과 내 생각과 달리 정상적인 등대임이 밝혀졌다.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낚싯배들이 포구를 떠나지 않자 등대도 할 일이 없어 벌어진 결과라 나의 무지의 소치를 반성했다. 사소한 것이라 넘길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가족 여행 후기도 논픽션 기록인 만큼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는 생각에 팩트 체크의 중요성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등대야, 미안하다.     


#안목 해변의 전망 좋은 횟집

 1시간 넘게 편안하게 쉬다가 오후 5시 30분께 숙소를 나섰다. 19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까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층별 버튼을 누르다가 아래쪽에 card here,라는 영어 문구와 함께 객실 출입 카드 그림을 발견했다. 내려갈 때와 달리 올라갈 때는 반드시 객실 카드를 접촉해야 층별 버튼 기능이 작동한다고 딸이 웃으며 설명했다.


안목 해변으로 가기 전, 잠시 들른 와인 매장 근처에서 요즘 보기 드문 시멘트 중공(中空) 벽돌담이 눈에 띄었다.


예약한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잠시 와인 매장(賣場)에 들렀다. 아까부터 동생과 핸드폰을 쳐다보던 아들이 일러 준 주소를 교통안내 앱에 입력하고 차를 몰았다. 빗방울은 감질나게 계속 오락가락했다.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를 합쳐 3병을 구매한 뒤 횟집 앞에 도착했다. 길이 500m에 이르는 백사장과 커피 거리로 소문난 안목 해변은 평일인데도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오후 6시가 넘자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날씨가 제풀에 지쳤는지 비도 멈췄다. 사천 해변과 달리 안목 해변의 바람은 매서웠다. 바닷가에서 나는 소나무라는 근사한 상호와 어울리게 2층 건물의 횟집 외관은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을 흉내 낸 듯, 중후하고 멋스러웠다.


안목 해변에 자리한 횟집. 외관이 인상적이다.


2층 창가 바다 전망 단독 방에 자리 잡은 우리는 모둠회 큰 접시와 소주, 음료수를 주문했다. 딸이 찾은 강원도 지역 소주가 없는 것이 특이했다. 주류 냉장고에는 서울의 일반 음식점에서 흔히 보는 소주들만 가득했다. 짐작건대, 외지 관광객들로 붐비는 안목 해변 거리 특성을 고려한 영업 전략이 아닌가, 싶다. 방마다 서빙 도우미가 따로 배치됐는데, 다들 늘씬하고 매력적인 미모의 소유자들이라 횟집의 유명세를 더했다.


바닷가 횟집답게 메인 음식에 앞서 나온 해산물 세트가 풍성하고 싱싱했다. 관자, 멍게, 문어숙회, 초밥, 전복, 오징어회, 가리비찜에 생선구이까지 입맛 돋우는 애피타이저라기에는 배가 불렀다. 아들과 딸, 나 셋은 소주로, 술 체질이 아닌 집사람은 환타로 건배를 외쳤다.


해산물 세트


모둠회도 넉넉하게 차려졌다. 광어, 우럭, 방어, 돔 4종 세트가 올려졌는데, 애피타이저의 포만감이 가시지 않아 3분의 1 가량을 남겼다. 매운탕으로 텁텁해진 입맛을 가셔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한 취기에 가족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진 밤이었다.     


모둠회


#포도주 파티     

 술 마신 나를 대신해 집사람이 운전해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포도주 파티로 2차 술자리를 이어갔다. 포도주를 제법 마셔봤는지, 능숙한 솜씨로 코르크 마개를 딴 아들이 적포도주 병을 쥐고 돌아가며 한 잔씩 따랐다. 또 한 번 외친 건배가 흥겨웠다. 생전 처음 본 치즈며 마트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스낵류에 자꾸 손이 갔다.


20대 초중반 청춘의 술 취향에도 귀 기울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운 빛깔에 마음이 끌렸는지,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는 집사람도 조심스레 몇 모금을 마시더니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포도주, 마실만하네. 나도 웃고 아들도 웃고 딸도 웃었다.


네 가족이 다 모인 것도 오랜만이고, 아무런 신경 쓸 일 없는 편한 자리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는 앞으로도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 이날 밤 오고 간 대화는 예사롭지 않았다.      


안목 해변에서 바라본 밤하늘과 밤바다. 파도는 밤에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끔 친구들과 어울리며 마신 포도주의 부드럽고 달콤 쌉싸래한 맛에 길들인 주력(酒歷)을 과신한 탓인지, 홀짝홀짝 들이키는 속도가 빨라진 딸은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을 갔다 오다 큰방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는 없는 가족 모임만의 훈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반증하는 행동이었다나, 뭐라나 하는 딸의 취중 너스레에 우리 모두 웃고 말았다.      


강릉의 첫날밤이 깊어 가고, 테라스 너머 파도 소리는 부지런히 밤의 적막을 흔들어 깨웠다. 가족의 정(情)도 무르익어 갔다. 집사람과 딸이 큰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거실로 나와 보니 주방 식탁 위에 분명 아들이 먹다 남겼을 간편식 부스러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테라스 탁자 위에 빈 캔맥주 하나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알코올 기운만 들어가면 시장기가 발동되는 아들의 술버릇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들아, 고장 한 번 나지 않는 취중(醉中) 초지일관(初志一貫) 정신이 그저 놀랍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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