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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l 06. 2023

삶의 정거장에서

9. 6년 만의 온 가족 여행 ②가족 여행 2일 차

가족 여행 2일 차 2023622()


#바다는 말이 없다.

 일기예보의 변덕은 여전했지만, 이날의 종잡을 수 없는 기상변화는 심술이라기보다 반가운 선물로 다가왔다. 사천 바닷가의 아침 하늘은 흐린 듯, 맑았다. 보기 좋게 예보가 빗나갔다. 기분 좋은 오보(誤報)다. 험악한 인상을 쓰지 않고 담담하게 흘러가고 있는 구름이 비가 내릴 조짐을 차단해 오후의 행보를 기대케 했다.


가족 여행 이틀째 아침,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늘에서 비의 예감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와 달리 세찬 바람의 기세도 맥이 풀렸고, 파도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했다. 덥지도 않고 습기도 견딜만했다. 오보가 딴마음 먹지 말고 오후 내내 이어지길 바라며 테라스에서 나의 루틴, 스트레칭을 몸이 기억하는 순서대로 진행했다. 눈앞에 펼쳐진 사천 바다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70년대 얄개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배우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묵은 숙소 외관.

 

‘바다가 보고 싶다.’ 만성신부전증으로 죽음을 앞둔 그는 거동이 불편한 자신을 책망하며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46년 인생의 종료가 임박한 심리적 절벽에 선 자가 발아래 천 길 낭떠러지를 굽어보며 한 이 말이 나에게는 한 줌도 되지 않는 마지막 에너지를 모두 쥐어짜 낸 절규(絶叫)로 읽힌다. 시한부 인생의 바다는 어떤 의미일까. 사천 바다는 말이 없고 파도는 자연이 시키는 대로 제 몸을 내어주며 어찌할 수 없는 소리만 지를 뿐이다. 살아 있다면 일흔하나 일 그 배우의 명복(冥福)을 빈다.  

    

오전 9시경 사천 포구. 고기잡이배들이 정박해 있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어촌 풍경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오전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자동 발동된 취탐(醉貪)을 못 이긴 대가로 숙취(宿醉)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아들을 반강제로 일으켜 깨웠다. 숙소에서 7km 떨어진 초당 순두부 마을로 차를 몰았다. 해장 겸 브런치를 해결하기 위해 딸이 예약 대기를 걸어둔 식당은 짬뽕 순두부로 유명한 맛집이었다.


점심시간 전이었는데도 식당 앞 주차장이 꽉 차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대로변 갓길에 주차했다. 몰려든 인파로 문전성시를 이룬 식당은 규모가 크고 회전율이 높아 하루 종일 북적일 것으로 짐작돼 음식 맛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도 높았다.


브런치로 먹은 짬뽕 순두부. 명성과 달리 맛은 별로였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첫술을 뜬 나는 평범한 면발의 식감에 놀라고 자극적이고 강한 조미료 맛이 뱃속을 거북하게 하는 바람에 또 놀라 해장은커녕 허기진 빈속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역시 중국집 외식의 국민 메뉴 짬뽕의 품격을 제대로 차린 집은 드물다는 것을 또다시 실감했다.


여행기(旅行記)를 쓰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해장에 대한 시선이 남다른데, 여태껏 해장의 한자어가 숙취로 괴로운 장을 국물이나 술로 풀어준다는 풀해(解), 창자 장(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해장의 원래 한자어는 풀해(解), 숙취 정(酲)인데 우리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부터 속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인 해장으로 한글 발음도 변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일상적인 단어의 유래가 된 어원(語源)에 눈뜨게 되는 점도 글을 쓰면서 느끼는 보람이 아닐 수 없다.     


한낮의 안목 해변.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 고운 모래사장이 한데 어울린 모습이 조화롭다.


#안목 해변 카페 거리

 아들의 얼굴에는 숙취의 괴로움이 골고루 퍼져 있었다. 브런치 다음 일정이기도 했고, 카페인 성분에 힘입어 술 마신 이튿날 숙취 해소에도 도움이 되는 맛있는 커피를 즐기기 위해 안목 해변 커피 거리로 이동했다. 딸이 원래 점찍어둔 카페에 들어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관광객을 가득 싣고 온 전세버스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정차하는 것을 보고서 다른 장소를 찾아 나섰다.


우리가 들어가려다 만 카페 앞에 막 정차한 전세버스.


해변 도로를 따라 100여 m 쯤 올라가다가 딸의 손짓에 따라 걸음을 멈췄다. 세련된 통창 외관을 한 3층 건물이었는데, 분위기가 괜찮아 보였다. 1층에서 주문하고 맨 위 3층 계단 쪽에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 창가 테이블로 옮겼다. 카페 통창 안에서 눈에 들어온 바다는 백사장에서 내다본 바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문한 냉커피와 과일 주스, 생크림 케이크는 맛깔스러웠고, 맛은 첫인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우리가 주문한 냉커피와 과일 주스, 생크림 케이크.


채 가시지 않은 술 냄새가 푸석푸석한 얼굴에 그대로 베 있는 아들은 힘에 부치는지, 자꾸만 옆자리의 엄마 어깨에 기대어 게슴츠레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담배 생각이 나 카페 아래층으로 내려가 바로 옆 골목 안으로 들어섰는데, 골목을 끼고 있는 건물이 낯익다 싶어 쳐다보니 어제 들른 횟집이었다. 한낮의 횟집은 인기척이 없었다. 딸의 채근에 자리를 떴다. 다음 일정은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탐방.     


우리가 들른 카페와 횟집 사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예스러운 고샅(골목길). 낡고 오래된 기와집들이 골목을 따라 이어져 있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탐방

 다행히 날씨는 아직 심술을 부리지 않고 변덕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로 가는 길은 해변 드라이브 코스로 이어져 눈이 즐거웠다. 운전을 책임진 나도 전방(前方)을 예의주시하는 틈틈이 조심스레 곁눈질로 동해의 경치를 찔끔찔끔 훔쳐봤다.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동해의 절경을 감상할까, 하다가 그대로 2km 정도를 달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주차장에 도착했다.


바다부채길 초입에 설치된 심곡 타워 전망대


강릉시 강동면 심곡리에 자리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동해를 끼고 2.86km에 걸친 탐방로로 조성돼 있다. 정동심곡은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에서 정동(正東) 방향으로 깊은 골짜기(深谷) 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바다부채길은 탐방로가 위치한 지형이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을 닮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형의 특성이 해안선을 따라 분포하는 계단 모양인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海岸段丘)로 동해 탄생의 비밀을 품은 200만~250만 년 전의 지각 변동을 살펴볼 수 있는 비경(祕境)이라 천연기념물 437호로 지정돼 있다. 눈의 갈증을 풀어주는 동해의 푸른 파도와 기암괴석이 장관(壯觀)이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오랜 세월 풍화(風化) 작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바닷가 암석.


 모처럼 둘이 오붓하게 정담(情談)을 나누겠다는 아들과 딸은 탐방로 산책 대신 심곡항 근처에 머물렀다. 집사람과 나는 성인 입장권 2매를 사서 탐방로로 들어섰다. 입구를 조금 지나자 심곡 타워 전망대가 나왔다. 그곳에 올라 바라본 동해의 수평선 너머로 뭉게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창공(蒼空)의 지배자 같았다.


군부대의 해안경비 경계근무 정찰로(偵察路)로 오랫동안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탐방로는 발길 닿는 곳 모두 천혜의 절경(絶景)이요, 눈길 가는 곳 모두 억겁(億劫)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신비스러운 경치였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가 눈에 들어온 해안가 바닷물. 날마다 바다와 육지 사이를 오가는 저 바닷물의 기원(起源)은 어디일까, 궁금했다.


탐방로 곳곳은 보행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인공구조물인 덱(deck)으로 연결돼 있었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온 사방에 포진한 빼어난 경관에 감탄한 탐방객들의 짧고 굵은 탄성(歎聲)이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동해의 해안선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얼굴을 감췄다가 드러내는 루틴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을 바위들은 묵묵히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고 몸소 실천한 덕행(德行)에 감복한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우리 눈앞에 기암(奇巖)과 언젠가 기암이 될 괴석(怪石)으로 서 있다.


왼쪽 절벽 숲 아래로 보행 편의를 위해 탐방로 곳곳에 설치한 인공구조물 덱이 보인다.


바다와 하늘, 바위, 깎아지른 절벽에 고고히 뻗어 있는 소나무가 대자연의 경외가 어떤 것인지,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세파(世波)에 시달려온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절경은 계속되고 입구에서 1km쯤 지났을까, 부채를 쏙 빼닮은 부채바위가 등장했다. 부채바위는 이곳에서 0.86km 떨어진 투구바위와 함께 탐방로의 양대 명물(名物)이다. 포토존에서 흐르는 시간을 영원히 박제(剝製) 기념하기 위해 부지런히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박제된 바위와 하늘, 바다의 모습이 늠름했다.


해안가에 조용히 엎드려 있는 괴석(怪石). 언젠가는 흐르는 세월에 등 떠밀려 괴암(怪巖)이 될 존재들이다.


 투구바위를 향해 절반쯤 나아갔을 무렵, 집사람과 나는 발길을 돌렸다. 애꿎은 다리의 혹사(酷使)도 방지하고 연속 장면으로 이어진 황홀한 비경에 취한 잊지 못할 감흥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심곡항 입구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갈 때보다 가벼웠다. 입장료 3,000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했다.


수백만 년 지각 변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해안가 바위들.


입구를 빠져나오자 저 앞에 낯익은 뒷모습이 실루엣처럼 나타났다.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 하나씩을 들고 걸어가고 있는 아들과 딸이었다. 둘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일까, 기억을 되짚었다. 아무리 기억회로를 되돌려도 아이들이 어릴 때 추억만 되살아났다. 남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웃고, 집사람도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이 멈출 수 있다면, 하고 혼자만의 상상을 해봤다.

 한나절이 훌쩍 지난 오후 3시 30분, 다음 방문지 오죽헌을 향해 떠났다.     


어릴 때 보고 처음 본, 아들과 딸의 뒷모습. 딸은 여행 10여 일 전 왼 발목을 삐어 부목(副木)을 대고 있다.


#강릉 오죽헌(烏竹軒)

 어릴 때, 숱하게 들어본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의 친정(親庭) 집이자 그의 아들 율곡 이이(1537~1584)가 태어난 곳이다. 조선 전기 강릉의 선비로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1390~1440)이 지은 보물 제165호 목조건물인데,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오죽헌 입구


오죽헌의 안팎을 가르는 자경문(自警門),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와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벼루 등 유품이 소장된 어제각(御製閣), 이이와 신사임당 일가(一家)의 유품을 전시한 율곡 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이 경내에 있다.


오죽헌의 안과 밖을 가르는 자경문(自警門)


내가 오죽헌을 처음 방문한 것은 70년대 초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오죽헌은 그때와 너무 달라 옛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당시 내가 봤던 현장이 여러 차례 개 • 보수된 데다 경내 건축물 대다수가 새롭게 지은 것이라 소환될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이이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문성사(文成祠)


모든 시설물과 건물들을 다 둘러봤을 때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랑비와 이슬비의 중간 강도로 내리는 비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빠져나갔다. 그놈의 심술보 오래도 참았네, 하며 변덕스러운 날씨에 혀를 끌끌 차며 숙소로 갈까, 고깃집으로 바로 갈까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오죽헌 경내. 오른쪽에 이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오죽헌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에 오른 시간이 오후 4시 40분이라 원래 일정대로라면 숙소에 들렀다가 식당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나는 예정대로 숙소로 가 잠시 쉬었다, 가자고 원안(原案) 사수(死守)를 주장했으나 나머지 세 사람이 허기를 참기 힘들다며 내민 식당 직행 안(案)에 밀려 차로 5분 거리의 수제 생갈비 음식점을 찾아 나섰다.      


조선시대 호패(號牌)가 전시된 기념관


#이른 저녁과 고스톱

 도착한 식당은 지리산 토종흑돼지 전문점이라는데, 오죽헌 탐방객들에게 입소문이 난 곳이라고 딸이 귀띔했다. 지리산 고랭지에서 사육한 암퇘지 한돈만 취급한다는데, 주문과 동시에 지방과 뼈를 발라내는 정육(精肉) 과정을 거친 생갈비와 양념갈비 두 종류를 판매하고 있었다. 생갈비와 양념갈비를 섞어 주문하자 잠시 후 이글거리는 불꽃이 강력한 화력(火力)을 보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참숯불이 올려졌다.


생갈비와 양념갈비 둘 다 육질이 부드럽고 씹을 때마다 감칠맛이 돌아 굽는 속도도 빨랐고, 먹는 속도도 경쟁하듯 빨랐다. 모처럼 돼지고기의 풍미(風味)를 느낄 수 있었던 저녁이었다. 굽기도 바쁘고 먹기도 바빠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거짓말처럼 비가 멈췄다.



요즘 날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예측불허의 기습작전에 능한 게릴라 같다는 생각과 함께 일상적인 업무수행이 난망할 일기 예보관들의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집사람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들과 딸이 여행지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쉽지 않은 만큼 숙소 근처 맥주 가게에서 둘이 한잔하면서 남매간의 우애를 다지라고 권유했다. 그러겠노라 대답한 아들과 딸을 숙소 앞에 내려주고 집사람과 나는 숙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사천 해변과 포구를 따라 산책길에 나섰다.


한 시간쯤 지나 숙소로 돌아가 거실에 앉아 있는데, 아들과 딸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맥주 마실 데가 있긴 있는데, 썩 내키지 않아 차라리 테라스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맥주와 안줏거리를 사 들고 왔다는 것이었다. 캔맥주 하나씩 들고 둘은 테라스에서, 집사람과 나는 거실에서 느긋하게 강릉에서의 이틀째 밤을 즐겼다.      


 전날 과음한 숙취의 후유증이 남아 있어 컨디션이 신통치 않았던지, 아들은 한 시간 만에 서둘러 테라스 정담(情談)을 마무리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할 얘기는 다 했다며 딸은 얼마만 인지 모를 오빠와의 둘만의 시간에 만족해했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번에는 딸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재미 삼아 화투 놀이, 고스톱을 치자며 편의점에서 사 온 화투(花鬪)를 방바닥에 꺼내 놓았다. 고스톱을 칠 줄은 알지만 좋아하지는 않아 언제 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나도 딸의 성화(成火)가 싫지는 않았다. 바닥에 요를 깔고 딸이 선(先)을 잡았다.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풍경이 각각 네 장씩 그려진 48장의 화투를 섞는 솜씨가 영 신통치 않았다. 딸은 묻지도 않았는데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심심풀이로 배워 서툴지만 치는 요령은 알고 있다며 전투 의욕을 불태웠다. 재미로 치는 오락 화투라도 형식적이나마 내기를 걸어야 화투판에 격(格)이 선다는 딸의 말에 점당 100원을 책정했다.


첫판을 7점으로 난 내가 선을 뺏어온 뒤 내리 두 판을 또 이겨 초반 기세가 일방적으로 흐르는가 싶었는데, 어설픈 화투판 아우라와 달리 딸의 반격이 시작됐다. 네 번째 판에서 다시 선을 되찾아간 딸은 다섯 번째 판에서 고(go)를 두 번 외치고 큰 점수를 올리며 전세를 역전시키는가 싶더니 여섯 번째 판과 일곱 번째 판에서도 압도적인 점수를 내며 완승했다.


저녁 7, 노을이 지고 있는 사천 바닷가 하늘


화투패가 시원찮았는지, 의도적으로 딸을 밀어주기 위해 모성애를 발휘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일곱 판으로 마감한 고스톱 승부에서 집사람은 한판도 이기지 못했다. 어쨌거나 모처럼의 고스톱으로 신바람을 낸 우리 셋은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와 음료수로 가볍게 하루의 피로를 털어낸 뒤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강릉의 이틀째 밤이 깊어 가고, 파도 소리는 어제와 같았다. 위선과 탈법이 판을 치는 혼탁한 세상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파도의 일상이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제법 많이 걷기도 했고, 이틀 연속 운전대를 잡은 피로가 쌓이기도 했는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핸드폰 헬스 앱을 확인해 보니 어제 하루 걸음 수가 1만 3천307보로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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