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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l 11. 2023

삶의 정거장에서

10. 6년 만의 온 가족 여행 ③가족 여행 3일 차 <終>

가족 여행 3일 차 – 2023년 6월 23() <>


#바다 물결의 자존감

 가족 여행 마지막 날이 밝았다. 숙소 테라스에서 본 하늘은 맑고, 습하고 더운 공기가 낌새를 알아챌 새도 없이 밀려와 얼굴을 덮쳤다. 며칠째 오락가락하던 기상 흐름이 정상 컨디션을 되찾아 아침부터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흰 구름이 빠른 속도로 달아나 푸른 하늘의 속살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보아 한낮의 햇살이 만만찮을 것임을 예고했다. 


구름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햇살들푸른 하늘의 속살이 드러나는 순간그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다 물결 위로 내려앉기 시작할 것이다.


평화로운 바다 물결은 곧 들이닥칠 뜨거운 햇빛의 공격을 눈치채고 있을까. 며칠간 참았던 햇빛의 대대적인 공세를 속절없이 바라봐야만 할 물결의 심정은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물결 자신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을 수 있겠다는 마음에 바다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상념(想念)에 빠진 나와는 상관없이 물결은 자연의 섭리(攝理)를 또 다른 자신으로 여기며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똑같은 얼굴로 기꺼이 햇빛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럭미역국과 물회

 집사람과 어제 해거름 산책 때 봐둔 포구(浦口) 식당에서 아침 끼니를 때우려고 나섰는데, 딸이 근처 다른 맛집을 추천했다. 사천 포구 수산물 직판장 옆에 자리한 큼지막한 매장을 갖춘 식당으로 평일인데도 우리처럼 아침 식사를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로 제법 붐볐다. 


물회와 우럭미역국이 간판 메뉴라 우리는 물회 1인분과 우럭미역국 2인분을 주문했다. 해초무침과 무채, 김치 등 밑반찬이 정갈하게 차려졌고, 입맛을 돋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우럭미역국을, 집사람과 딸은 우럭미역국과 물회를 시켜 나눠 먹었다. 


미역을 씹을 때 나는 상큼한 바다향이 입안 가득 퍼졌고, 무엇보다 국물이 시원해 술꾼들이 속풀이 하기에 알맞았다. 갓 잡은 우럭을 당일 손질해 미역과 함께 맑게 끓여 부드럽게 풀린 우럭살은 고소한 맛이 뛰어나 밥도둑이 따로 없겠다, 싶었다.


소식(小食) 체질인 나에게 굳이 한 숟가락만, 하고 딸이 작은 접시에 덜어준 물회를 국물째 떠먹었는데, 속이 뻥 뚫리는 청량감(淸涼感)에 깜짝 놀랐다. 활어회를 좋아해 물회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는 나는 이 맛에 물회를 먹는구나, 하고 물회의 진면목(眞面目)을 새롭게 알게 됐다. 아들은 입맛도 없고, 잠도 부족하다며 숙소에 남았다.


 #숲속 카페

 체크 아웃 20분 전인 오전 10시 40분 짐을 싸 들고 방에서 철수한 우리는 1층 야외에 설치된 분리수거장에 들렀다. 상시 대기 중인 것으로 보이는 용역 직원 2명이 친절하게도 우리가 들고 간 여러 개의 쓰레기봉투를 대신 받아 처리해 줬다.


10분쯤 달렸을까, 도로변 숲속 안쪽으로 회색 외관이 인상적인 3층 건물, 카페가 보였다. 도로를 낀 숲 초입에 자리한 카페는 아늑하고 운치가 있었다. 한적하고 외진 곳에 홀로 숨어있는 듯한 모습과 달리 카페 안과 밖은 드나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맞은편 바닷가 앞에는 일렬횡대로 줄지어 넓게 펼쳐져 있는 캠핑장도 눈에 띄었는데, 피서철엔 카페의 빈자리가 없을 것으로 짐작됐다.     


도로변 숲속 안쪽에 고즈넉이 들어앉은 3층 규모의 카페 건물건물 내부는 물론 야외 테라스에도 사람들이 몰려 있다.     


2층으로 올라가 창가 쪽을 기웃거리다가 숲을 직접 보고 싶어 1층 야외 테라스 그늘진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강릉이 왜 커피 명소로 소문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있던 차에 중년 여성 2명이 무슨 종(種)인지 알 수 없는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저 앞 테이블에 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돗자리 비슷하게 생긴 깔개를 바닥에 펼치자 강아지는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그 위에 얌전하게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정면만 주시했다. 훈련이 잘된 듯한 강아지에게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쏠렸는데, 기품있는 생김새와 의젓한 모습, 둘 다 동물임을 잠시 잊게 하는 보기 드문 광경이라 본능적으로 마음이 쏠린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낙산사로 갈까휴휴암으로 갈까.

 정오(正午)가 됐다. 집사람은 진작부터 가고 싶었다며 양양 낙산사(洛山寺) 행을 제안했고, 딸은 여기서 40km나 떨어져 거리가 너무 멀다며 절반 거리인 양양군 현남면 바닷가 암자(庵子)인 휴휴암(休休庵)이 낫겠다고 절충안을 제시했다. 결정된 대로 따르겠다는 아들과 나를 두고 집사람과 딸이 한참 의견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서울로 직행!


집사람이나 딸이나 둘 다 저녁에 변경 불가한 다른 일정이 있어 낙산사든, 휴휴암이든,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자칫 시간을 맞추지 못할 낭패의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집사람과 딸의 결정은 현명했다.     


카페 건물 1층 아래 개방형 수납공간에 사용처가 궁금한 통나무 장작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


#햄버그스테이크의 추억

 주유 계기판을 보니, 서울까지 주행하기에는 기름이 모자라 강릉 외곽 주유소에 들른 뒤 동해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예상대로 서울 방향 동해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출출하기도 하고, 식사 때가 되기도 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첫 번째 휴게소로 곧장 들어갔다. 


음식 주문은 키오스크를 통해 이뤄졌다. 화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던 중 햄버그스테이크에서 눈이 멈췄다. 양식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대학 시절 경양식집에서 소개팅하던 추억이 떠올라 주저 없이 선택했다. 메뉴가 메뉴인지라 요리 시간이 꽤 걸리네, 하는 순간 호출 번호가 안내 스크린에 떴다. 소위 오랜만에 해보는 칼질에 피식, 웃음이 났다. 맛은 평범한 수준이었으나 수프 맛은 대학 때 먹던 그대로였다.      


#서울로 가는 길

 올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로 가는 길은 무난한 편이었다. 화도 I.C 통과 구간에서 약간 정체 현상을 빚었는데, 알고 보니 무성의한 차로 공사 안내 표지가 원인이었다. 평일이 아니라 주말이나 공휴일이었다면, 이 구간을 지나는 운전자들이 꽤 스트레스를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을 벗어난 지 3시간 30분이 지나 딸의 거처인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낙산사는 물론이고 휴휴암을 갔더라면 저녁 일정에 차질이 있을 뻔했다고 딸이 웃으며 말했다. 딸을 내려주고 정릉과 안암동을 거쳐 북악 방면~내부 순환도로~강변북로 코스를 달려 최종 목적지 일산에 다다랐다. 한 시간 조금 더 걸렸다.      


5시간 가까이 운전한 몸은 무거웠으나, 마음은 가벼웠다. 모든 가족 여행이 그러하겠지만, 이번 2박 3일 강릉 나들이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 아들과 딸에게 감사한다.     


#아들과 딸의 빈자리

 강릉 여행의 따뜻한 여운이 그대로 남아 있는 7월 2일, 딸에 이어 아들도 오피스텔로 이삿짐을 옮긴 날 밤에 집사람은 나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2주 전 딸아이의 오피스텔 방 정리를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꾸 눈물이 나 감정을 추스르는 데에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이미 기숙사 생활을 해 한 차례 집을 떠난 경험이 있는 딸이지만 이번에는 아이의 빈자리가 서운하고 허전한 감정으로 채워질 것만 같아 자기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졌다는 말에 나도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언젠가 아들과 딸이 짝을 만나 떠나갈 때는 또 어떤 감정이 모습을 드러낼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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