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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n 12. 2023

삶의 정거장에서

6. 상추 한 봉지

상추 한 봉지의 가르침


 얼마 전 아파트 현관문 앞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지 속에는 아직 흙냄새가 남아 있는 상추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있는 메모도 없고, 초인종 벨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한 번씩 근처에 사는 집사람의 지인이 텃밭에서 수확한 거라며 상추와 고추 따위를 문 앞에 두고 가는 경우가 있어 나는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다. 


먹다 남은 상추가 있어 봉지째 냉장고 안에 넣고는 그 사실을 집사람에게 알렸는데, 얼마 후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인에게 확인했는데, 자기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집 문 앞에 기별(奇別)도 없이 상추를 갖다 놓을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곰곰 생각해 봐도 그럴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아래층 할머니가 생각났다. 70줄을 넘긴 듯한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지난해인가 언젠가 텃밭에서 딴 거라며 가지와 호박을 한 아름 안겨 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집사람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벌어진 우연의 일치를 일반화하지 말라며, 나의 추측이 억지스럽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택배도 아니고, 상추 한 봉지가 배달 사고가 날 리도 없을 텐데, 하면서 내심 나의 추측이 맞는지, 안 맞는지 궁금해 할머니와 마주치는 날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막상 찾으면 없다고 평소 엘리베이터 안이나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할머니의 모습은 무슨 일인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바깥출입이 잦은 주말이 두 번이나 지나가도록 기다리던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 집 초인종을 눌러볼까, 하다가 괜히 민망한 일이 벌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그것 때문에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할머니에게 부담만 안겨드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만두었다.      


아래층 할머니가 몰래 전해준 상추는 농약이나 비료의 도움 없이 자란 원형질 채소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보름 남짓 지났을까, 상추 한 봉지의 비밀이 드디어 풀렸다. 그날도 나의 공부방 겸 놀이방인 오피스텔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내렸다. 문이 열리고 몇 발짝 걸어가자 잰걸음을 하며 출입구 안으로 들어오는 할머니의 모습이 반갑게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늦은 오전 무렵, 항상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습관이 있었다. 아마 이날도 루틴처럼 굳어진 시간에 맞춰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모양새였다. 언제나처럼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블라우스에 바지, 운동화 차림에다 한 손에 든 양산까지 눈에 익은 복장이었다. 


눈인사로 반갑게 아는 채를 한 뒤 추측의 빗장을 열 한마디를 조심스레 준비했다. 할머니, 혹시 지난번에 그 상추 봉지……, 내가 미쳐 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할머니는 아휴, 별것도 아니라 기별을 넣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봉지에 조금 담아 문 앞에 두고 왔어요, 하고 오히려 겸연쩍어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맞네요, 라며 나는 할머니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돌아섰는데, 오피스텔까지 걸어가는 35분여 내내 할머니의 고운 마음씨가 자꾸 떠올라 기분이 좋았다.     


 20년이 넘은 이곳 아파트 생활에서 상추 한 봉지의 사례처럼 이웃의 따스한 정을 온몸으로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하찮은 일상이 때로는 특별한 고마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인정의 속살을 깨닫게 한 상추 한 봉지는 그래서 나에게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깟 상추 한 봉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때로는 조건 없이 슬며시 내미는 작은 마음 씀씀이에 울림이 있고, 삭막한 콘크리트 도시 생활 속에서도 살맛 나는 세상, 아름다운 삶의 의미에 눈 뜨게 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었다.


 곱게 늙어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어른들 말씀처럼 할머니의 결 고운 마음씨가 젊었을 때 뭇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세월을 거스르는 노년의 멋과 품격을 더욱 빛나게 한 상추 한 봉지였다.      


 노부부가 건강하게 장수(長壽)하기를 빌어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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