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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버지에 대한 기억 ⑤아버지의 존댓말과 객지 생활

by 박인권

아버지에 대한 기억 ⑤아버지의 존댓말과 객지 생활


#어머니에게 존댓말을 쓴 아버지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두 살이 위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어머니와 결혼한 아버지는 2002년 돌아가실 때까지 50년을 서로 의지하며 한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또래의 어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반말을 쓰지 않았다. 부부간에 존대한다고 나쁠 리 없지만 그 시절 아버지 연배의 가장(家長)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아버지보다 한 세대 아래인 나도 집사람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라 아버지의 경우는 분명 이례적이라 할만하다. 요즘 젊은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반말이 당연하다는 뜻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보다 연상이 대세(大勢)인 시절이라 반말이 결혼한 부부의 관습적인 말투로 통용됐다고 볼 수 있겠다.


왜 그러셨을까,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존댓말 말투에 대한 궁금증을 내 나름의 유권해석으로 풀었다. 그것은 어머니와 말다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목격한 적이 단 한 번밖에 없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혹시나 형들은 다르게 생각하는지 몰라 물어봤는데, 나와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 형제가 없는 자리에서까지야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우리 앞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언쟁을 벌인 적이 한 차례뿐이었다.


#존댓말의 언어적 품격

존댓말은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는 절제의 장치도 된다. 말이 엇나갈 길목에서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큰소리를 낼 상황에서도 존댓말이 자제의 덕목으로 발동돼 흥분을 가라앉히는 신통한 약효가 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첫 말다툼이 마지막 말다툼으로 매듭지어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아버지의 존댓말 때문이라 여긴다. 일단 존댓말은 상대에 대해 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넘지 않도록 제어하는 감정적 제동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에 더해 존댓말을 사용하는 상대방에게는 본능적으로 말조심을 하게 되는 존댓말의 언어적 품격도 빼놓을 수 없다.


#존댓말의 반(反)친화적 속성

때로는 존댓말이 불편할 수도 있다고, 존댓말의 반(反) 친화적 속성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수평 대등한 관계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살다 보면 편한 말투로 허물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서로 간의 거리감이 좁혀지는 경우가 많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법칙이 만사형통(萬事亨通)이 아니듯이, 정서적 공감대와 친밀감 형성에 존댓말이 어색한 걸림돌로 작용하는 사례도 수없이 많다.


결국 존댓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말의 힘보다는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이타적인 성정(性情)을 앞세울 때, 존댓말은 두 배, 세 배의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친구 간에, 나이가 한참 어린 후배에게 존댓말을 상시(常時) 말투로 대하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함이 앞서 지지할 만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

그런 점에서 남남이었다가 사랑을 매개로 만난 부부 사이의 존댓말을 나는 개인적으로 지지한다. 부부관계는 특수한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다. 같이 살 때는 경제공동체이자 주거공동체며 양육공동체이자 운명공동체지만, 헤어지면 그냥 남남이다. 마음만 먹으면 양극단의 땅을 다 밟을 수 있는 인간관계가 부부관계 말고 또 있을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에 대척되는 부부간 촌수(寸數)는 무촌(無寸)이라는 말의 유래(由來)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언젠가 어머니도 내 생각과 비슷한 속마음을 내 비췄었다. 아버지가 존댓말로 대하니, 어머니도 자연스레 매사 언행에 신중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금슬(琴瑟)도 좋았다.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부모에게 숙명적으로 불효자인 자식

그런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한참 못 미친다. 나이가 든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젊었을 때 아이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어땠을까, 스스로 물으면 민망할 따름이다.


반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 앞에서 집사람과 고함을 지르며 다툰 일, 서로에게 앙금이 남을 도를 넘은 언어폭력, 감정 자제에 실패해 내지른 일탈적인 행동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원인이었다. 인격적 방어기제의 부재로 하찮은 일이 필요 이상으로 불거져 비롯된 소모적인 다툼이었다. 부덕(不德)의 소치(所致)다.


이제 와 새삼 존댓말 카드를 꺼내 들 수도 없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그저 참고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길이 지혜로운 부부 상생의 모범답안이라고 믿는다. 자식을 낳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그런 점에서 자식은 숙명적으로 부모에게 불효자가 아닐까, 여겨진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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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아버지, 가운데가 나, 오른쪽이 큰형이다. 경상북도 상주 시골 큰아버지 댁에서 찍은 아주 옛날 사진이다. 짐작건대 내가 초등학교 입학 한두 해 전일 때 같다.


#밥 먹듯이 이삿짐을 싼 대학 생활

대학 입학 후 서울로 올라온 나는 1학년 때 친척 집 신세를 졌고, 2학년 때는 하숙(下宿), 3학년 때는 다시 친척 집, 4학년 때는 한 번 더 하숙 생활을 했다. 지금은 보기 드문 바퀴 3개 달린 용달차로 주로 이삿짐을 옮겼고,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대학 교재를 담은 종이 상자와 옷가지 상자, 이불 보따리, 천으로 된 조립식 옷장, 책상과 의자, 기타 잡동사니가 전부지만 짐을 싸서 옮길 때마다 친구의 손길을 빌려야만 했다. 이삿짐 싼 횟수만 6~7번은 되는 것 같다.


#아버지의 손 편지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공중전화를 이용해 부모님과 통화했는데, 그럴 때마다 가게에서 동전을 바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객지 생활을 하는 아들과의 통신 수단이 극히 제한적일 때라 아버지는 한두 달에 한 번꼴로 손 편지를 보내오셨다. 손 편지에는 한자어가 그득했다. 다행히 우리 세대는 중고교 때 한자 교육을 받아 한자를 읽고 쓰는 데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 내용은 대개 이랬다.


- 객지 생활에 고생이 많다.

- 밥은 잘 먹고 다니냐.

- 학교생활은 재미있냐.

- 데모는 하지 마라.

-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담배 너무 피우지 마라.

- 용돈 헤프게 쓰지 마라.

- 공부도 다 한때니, 한눈팔지 말고 공부해라.

- 말을 많이 하지 마라, 말이 씨가 된다.

- 아버지 엄마는 잘 있다. 형들도 잘 있다.

- 건강 잘 챙겨라. 다음에 또 연락하마.


#하숙집의 공용 전화기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으면 기분이 착잡해졌다. 아들 셋이 모두 대학생, 그것도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학이라 학비 부담이 만만찮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일 뿐, 편지에 적힌 아버지의 육필(肉筆) 당부는 금방 잊히기 일쑤였다.


아주 가끔 아버지는 하숙집으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통화는 하숙집 주인 안방에 설치된 전화와 브리지 방식으로 연결한 하숙생들의 공용 전화기로 이뤄졌다. 공용 전화기는 하숙생들이 기거하는 방 바깥 거실 한쪽에 놓여 있었다. 당시 대학가 하숙집에는 이런 수신 전용 브리지 전화가 다 설치돼 있었다. 전화를 걸 수 없도록 시건장치(施鍵裝置)가 돼 있었다.


#멀고도 험난했던 금호동 가는 길

1학년 1학기 때는 학교에서 가까운 사촌 누나 집에서, 2학기 때는 금호동 큰 외삼촌 댁에 머물렀는데, 신촌에서 금호동을 오가는 길은 정말이지 멀고도 험난했다. 당시 신촌에서 금호동으로 가는 교통편은 버스 노선 1개뿐이었다. 정확한 버스 번호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34번이 아니었나, 추측할 뿐이다. 버스 정류장이 지금의 2호선 신촌역 5번 출구에서 이대 방향으로 20m가량 올라간 곳에 있었는데, 배차 시간이 길어 한 대 놓치면 20여 분은 족히 기다려야만 했다.


해거름이나 저녁 무렵 겨우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으면 이제부터 기나긴 시간과의 전쟁에 돌입해야 했다. 노선 코스는 아현동으로 진입해 서대문 로터리~서울역~명동~충무로~남산 1호 터널~한남대로를 지나 약수동과 금호동으로 이어졌다. 명동과 충무로 일대가 상습 정체 구간인 데다 왕복 2차선인 남산 1호 터널 입구에서 출구까지 빠져나오는데 30~40분이나 소요돼 말 그대로 악몽 같은 노선이었다.


신촌에서 금호동까지 빨라야 2시간, 평균 2시간 30분은 걸렸던 것 같다. 러시아워를 비켜 가는 등굣길은 그나마 다행으로 1시간 남짓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1981년 대학 1학년 2학기 귀갓길은 정말 끔찍했다.


아버지도 이런 사정을 알고 2학년 때는 학교 근처에서 하숙할 수 있도록, 더는 졸라맬 것도 없는 허리띠를 억지로 꽉 졸라맸다. 이 자리를 빌려 아버지의 노고(勞苦)에 삼가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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