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기억 ⑥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명제(命題)는 참인가.
#잠복이 있었던 아버지와 잠복이 없었던 어머니
아버지의 기상(起床) 시간은 빨랐다. 누우면 바로 잠이 드는 아버지가 부럽다, 는 말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괴롭힌 불면(不眠)의 언어였다. 어머니는 예민했다. 잠복을 타고 난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났다. 아버지의 잠복은 어머니에게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늦게 잠들고 비슷하거나 약간 늦게 일어났다. 아침마다 어머니의 몸과 마음은 분주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손이 빨랐다.
#어머니의 유일한 걱정거리, 불면증
우리 형제가 중고생일 때, 어머니는 날마다 도시락을 쌌다. 밥 짓고, 국 끓이고, 반찬 만들고, 도시락 싸는 시간은 1시간을 넘지 않았다. 아침 7시 30분, 삼 형제가 집을 나서면 어머니는 식후(食後) 병원에서 처방한 알약을 하루에 반 알씩 복용했다. 한참 후에 알았다.
어머니는 혈압이 높았다. 한 달에 한 번 동네 의원에서 한 달 치 약을 타는 일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됐다. 약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복용한 것은 의사가 내린 처방을 존중해야 마땅한 환자의 도리이기도 하면서 어머니의 꼼꼼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특별한 지병(持病) 없이 비교적 건강했던 어머니는 자기 관리에도 철저했다. 걱정이라면 불면증, 하나였다.
앞산 공원에서 바라본 대구 시가지. ⓒThorfinn Stainforth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대구 시민의 산, 앞산
새벽 5시, 아버지는 날마다 그 시간에 일어나 간편한 복장으로 산행길에 나섰다. 해발 660.3m의 집 근처 앞산이다. 등산 코스의 출발점이 산 중턱 못 미친 언저리에서 시작되는 앞산은 나도 여러 번 갔었다. 산세가 비교적 험하지 않고 등산로가 오밀조밀해 등산객들이 좋아했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대구 시내 전망이 일품이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가끔 놀러도 갔던 곳이다. 등산코스는 앞산 공원 공영주차장을 지나면서 시작된다. 어릴 때 집에서 앞산 공원 주차장까지 걸어가기도 했고,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가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주차장까지는 걸어서 30~40분 거리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경상북도 안동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사촌 누나의 소개로 알게 된 동년배의 그 학교 친구와 앞산에 놀러 갔다가 나쁜 형들한테 삥, 뜯긴 적도 있다.
앞산의 명칭은 대구 앞쪽에 있는 산이란 뜻이 굳어져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앞산의 원래 이름은 부처가 되는 산, 성불산(成佛山)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눈이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 한, 앞산 산행(山行)을 거르지 않았다. 젊었을 때부터 산행의 기운을 받은 탓인지 동년배보다 훨씬 건강하고 젊어 보였다. 어쩌다 아버지를 따라 새벽 산행에 나섰을 때 목격한 장면이다. 등산코스를 따라 쭉 올라가다가 비탈길이 나오면 아버지는 갑자기 뒤돌아서 뒷걸음질로 올라갔다. 눈대중으로 족히 50m쯤은 거뜬히 소화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건강 비결은 또 있다. 아버지는 냉수마찰(冷水摩擦)을 좋아했다. 심지어 한겨울에도 찬물에 수건을 적셔 꼭 짠 뒤 윗몸 구석구석을 문지르는 냉수마찰을 즐겼다. 산에 가기, 걷기, 냉수마찰은 아버지가 건강을 유지한 3대 비결이었다. 지나치리만치 철저한 건강관리 덕분에 칠순이 될 때까지 감기나 잔병치레 하나 없었다.
우리 가족은 물론 친구분들도 요즘 말로 ‘구구 팔팔, 이삼사’(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죽는 행복한 인생)는 맡아 놨다고 부러워했다. 불행한 반전(反轉)은 곧 다가왔다. 칠순 잔치 다음 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터졌다.
아버지의 빈소(殯所)가 차려졌던 영남대병원 장례식장. ⓒ영남대병원 홈페이지(www.yumc.ac.kr/cyber/
#말기 암 선고
발단(發端)은 이랬다. 2002년 8월 초순, 다니던 회사에서 내가 부장으로 승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생전 안 걸리던 감기가 아버지에게 찾아왔다. 동네 내과에서 두 번이나 처방받은 약을 다 먹어도 차도가 없어 세 번째 그 병원 문을 두들겼을 때 의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심상찮은 조짐이었다. 낯익은 의사의 표정이 낯설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의사는 몇 초간의 침묵 끝에 아버지에게 정밀검사를 권했다. 첨단 의료 장비를 갖춘 인근 대학 종합병원을 추천한 의사는 치료 소견을 작성한 뒤 서명한 진료소견서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어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태껏 심각한 병은 물론 잔병치레도 앓은 적이 없고, 흔한 감기 증상이 조금 오래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생각이 같았다.
아버지는 집 근처 대학병원에 소견서를 제출하고 정밀검사를 받았다. 1주일 후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충격적이었다. 의사는 보호자인 어머니만 따로 불러 검사 결과를 통보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비밀로 했다.
소견 : 급성골수성백혈병(혈액암), 진단 : 말기 암(癌), 생존 가능 시기 : 2개월여, 원인 : 미상(未詳)
청천벽력이었다. 말기 암이라니, 남은 삶은 2개월여. 어머니는 곧바로 큰형과 둘째 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서울에 있는 나에게는 둘째 형이 전화로 기별(奇別)했다. 나는 전화를 받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건강한 아버지가 암, 그것도 말기 암이라는 소식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월차휴가를 내고 대구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입원 중인 병원에 가족들이 다 모였다. 아버지의 팔에는 링거주사기와 이름 모를 또 다른 바늘이 꽂혀 있었다. 약간 초췌해 보일 뿐, 아버지는 걷고 움직이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다. 집으로 자리를 옮겨 형들과 머리를 맞댔다.
주치의 소견은 수술적 치료의 전망이 비관적이지만, 의학적 판단에 기초한 여생(餘生)에 비추어 수술적 치료의 시도를 권장할 만하다는,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수술 결과에 대한 지극히 낮은 기대치, 고령인 아버지의 체력 조건, 어머니의 의견 등을 종합해 우리 가족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만 몰랐던 병명(病名)
첫째, 수술적 치료는 하지 않는다. 둘째, 후유증이 큰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도 하지 않는다. 셋째, 보름에 한 번씩 통원해 혈액 교체 치료를 받는다. 넷째, 검증된 민간요법을 제한적으로 시행한다. 주치의 소견대로라면 시간이 촉박했다.
아버지는 아직 진실을 몰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혈액 계통에 문제가 있는데, 열심히 치료하면 낫는다고 안심시켰다. 아버지는 속으로 뭔가 찜찜하다는 생각을 혼자 했을 수도 있겠구나, 짐작했다. 진실을 모르는 아버지는 금방 건강을 회복할 거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우리를 다독였다. 어머니는 이미 닥친 일이라 감정에 동요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하자고 우리에게 당부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새마을호 기차 안에서 여러 가지 상념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혈액암은 골수에 생긴 암세포가 주위 조직으로 퍼져 나간 병이다. 의학적으로 병의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나는 친분이 있는 한의사에게 부탁해 국내산 상황버섯을 구했다. 우체국 소포로 상황버섯을 부친 후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형들은 형들대로 수소문해 효험이 있다는 약재를 구했다. 보름마다 진행한 통원 치료 때는 둘째 형이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통원 치료를 한 날, 아버지는 많이 힘들어했다. 두 번째 통원 치료를 끝낸 아버지를 본 나는 마음이 아팠다. 수척한 기색이 역력했다. 날이 갈수록 쇠약해진 아버지를 보면서 암은 무서운 병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혈액암의 증상은 피로감, 무기력증, 어지럼증 등인데, 어머니에 따르면 아버지는 앉아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훨씬 많고, 수시로 주무신다고 했다.
대구에 있는 형들보다 나는 기동력이 떨어졌다. 회사 업무가 바쁘기도 했고, 서울~대구 간 물리적인 거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형들과의 통화에서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다. 어머니는 차마 말을 못 꺼냈지만, 큰형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나에게 말했다.
#시한부 삶의 마지막 전조(前兆)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11월이 되면서 날씨가 쌀쌀해졌다. 11월 26일 대구 집으로 전화했는데, 웬일인지 아버지가 직접 받았다. 그날따라 아버지의 목소리에 힘이 배어 있었고, 건강할 때의 카랑카랑한 특유의 쇳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목소리로만 판단하면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한 느낌이었다.
좀 어떠시냐는 물음에 아버지는 몸이 많이 좋아졌다며 빨리 건강을 되찾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 그렇지, 아버지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지, 라며 아버지의 쾌차(快差)를 속으로 빌었다.
아버지의 습작 노트 중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밝힌 글의 일부분. ⓒPARK IN KWON
#아버지의 부고(訃告)
3일이 지났다. 매일 오후 진행되는 부장단 제작회의가 끝나갈 무렵, 주머니 속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진동모드로 맞춰진 핸드폰의 몸부림이 유난히 별나게 감지됐다. 이럴 때 보통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데에, 꺼림칙한 느낌이 퍼뜩 들어 몸을 테이블 아래로 숙이고 통화버튼을 누른 채 귀를 갖다 댔다. 큰형이었다.
아버지, 30분 전에 돌아가셨다. 사망 시간은 2002년 11월 29일 오후 5시.
머리가 하얘졌다. 회의 종료와 함께 흡연실로 가 담배를 빼 물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 이렇게 모든 게 다 끝나는구나, 하고 허탈감이 밀려왔다. 집사람에게 전화해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회사에도 아버지의 부고(訃告)를 알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작별의 현장, 입관식장(入棺式場)
집사람과 아이들을 데리고 대구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빈소는 통원 치료를 한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삼일장(三日葬)으로 치르기로 하고, 장지는 대전현충원으로 정했다. 첫날 저녁부터 문상객들이 밀려왔다. 고맙게도 내 직장 동료 다수가 멀리 대구까지 문상을 왔다. 경황이 없어 미처 연락하지 못했는데, 신문 부고란을 보고 찾아온 지인도 여럿 있었다.
이튿날, 오후 2시 염습(斂襲) 절차가 진행됐다. 어머니도 울고, 형들도 울고, 나도 울었다. 아들만 셋이라 딸처럼 막내며느리를 예뻐한 시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집사람도 울었다.
장례가 끝나고 홀로 된 어머니 집에 형제들이 모였다. 쌓인 피로와 슬픔을 한잔 술로 달랬다.
30대 초중반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나는 지금도 돌아가시기 3일 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기억난다. 한창때나 다름없었던 그 목소리가 불과 3일 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억겁(億劫)의 세계로 영영 사라지고 만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냈다.
#하늘이 내리는 반짝 선물, 회광반조
불교 용어에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빛이 방향을 바꾸어 거꾸로 비춘다는 뜻인데, 해 떨어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되살아난 햇살 덕분에 하늘이 잠시 환하게 밝아지는 자연 현상을 가리킨다. 사람도 임종 직전 거짓말처럼 의식과 기운을 아주 잠깐 되찾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회광반조에 비유한 해석이다.
죽음을 앞둔 말기 암 환자는 뇌에 공급되는 산소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이라 의식이 흐릿하거나 오락가락한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어쩌다 뇌 상태가 호전돼 정신이 맑아지기도 하는데, 이는 찰나의 우연적인 현상에 불과해 이내 의식을 잃고 목숨이 끊기게 된다는 것이다.
#가혹하고 슬프게 끝난 착시 현상
생(生)과 사(死)의 문턱에서 건강 회복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시한부 삶의 마지막 전조가 아주 짧게, 역설적으로 출현한 의학적 착시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착시 현상의 결말은 몹시 가혹하고 슬프게 끝난다. 착시 현상은 이승을 떠나기 전, 하늘이 환자와 가족에게 내리는 최후의 반짝 선물이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선물의 수신자는 곧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바다로, 가족들은 망연자실, 슬픔의 눈물바다로 빠질 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국립대전현충원 묘역. ⓒPARK IN KWON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죽음의 땅을 밟기 전, 육신의 에너지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순식간에 스르르 꺼지는 신기루 같은 이 현상이 나는 고맙다기보다 야속하다.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슬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구 근교 절에서 진행한 망자(亡者)의 영혼을 떠나보내는 불교 의식인 사십구재(四十九齋) 때 어머니는 내가 알 수 없었던 얘기를 들려주셨다. 어머니에게 들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병명을 알게 된 아버지
투병 중인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를 부축해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에 나섰다. 산책 때마다 어머니는 병명(病名)을 모르는 아버지와 달리 오늘이 마지막 산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생각이 들어 몰래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벤치에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조용히, 조심스럽게 병명을 알렸다. 말기 암에 걸린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무심한 하늘만 쳐다봤다.
#아버지의 습작 노트
이날부터 아버지는 70 인생을 스스로 마무리하기 위해 신변(身邊) 정리에 나섰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기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책무를 위해 아버지는 병든 몸에 억지로 기운을 불어넣었다. 아버지는 평소 일기 형식의 습작(習作)을 틈틈이 노트에 적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솔직 담백하게 기록한 습작 노트를 소중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남긴 습작 노트는 지금 내가 보관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나는 아버지의 습작 노트를 소재 삼아 부모님의 삶을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이해 8월, 대구에도 많은 비가 내렸다. 아버지는 수해의연금(水害義捐金)으로 소정(所定)의 금일봉(金一封)을 지역 방송국에 기부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공동 묘비 ⓒPARK IN KWON
#아버지의 눈물과 어머니의 통곡
어머니는 사십구재가 끝나고 한참 지나 내가 대구에 내려간 날, 이런 얘기도 꺼냈다.
여생(餘生)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을 안 아버지는 역시 암으로 투병 중이던 친구분을 집 근처로 불렀다. 친구분이 타고 온 승용차 안에서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통곡했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았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내게 그때 얘기를 하면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무 외로워 보여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다.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한 유공자 자격으로 국립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계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년의 세월이 흐른 2014년 8월, 어머니도 아버지 곁으로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란히 누워 있는 묘지를 볼 때마다 생전에 두터웠던 두 분의 금슬(琴瑟)이 떠오른다. 생전에 못다 한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지하에서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 이라는 명제(命題)는 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