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대한 기억 ①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외갓집 방문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결사적인 이유
거짓말 같지만 3~4살 때, 자다가 깨 어머니를 찾아 울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 자궁과 어머니 뱃속은 인간 생명의 원천이다. 모든 인간은 그곳에서 열 달을 보낸 뒤 비로소 세상에 나온다. 본능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결사적인 이유다. 아버지의 기(氣)를 받은 어머니가 완성한 생명체의 인필귀모(人必歸母)라고 할까. 국어사전에 인필귀모라는 말은 당연히 없다. 필요불가결한 모태(母胎)의 의미를 다르게 나타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사필귀정(事必歸正)에 기대 즉흥적으로 떠올린 비(非) 사전적(辭典的) 조어(造語)니, 어색해 마시길.
#생명의 근원, 자궁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그림을 남긴 화가가 있다. 19세기 사실주의 미술의 거장 구스타브 쿠르베(프랑스, 1819~1877). 그는 ‘세상의 기원’(1866,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이란 파격적인 그림을 통해 여성의 자궁에 내재한 신성함과 신비성에 찬사를 보냈다. 생명 탄생의 출발점이 바로 여성의 자궁이라는 데에 착안한 제목의 이 그림은 특정 신체 부위를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클로즈업한 극사실적인 묘사로 공개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성의 자궁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임을 시각예술로 선언한 번득이는 직업정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19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대표작으로 서양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명화(名畫)다.
#어머니에 대한 대체 불가 애착심의 다른 이름, ‘아이고 엄마야’
한국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不問)하고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있다. 예기치 않은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무심결에 ‘아이고 엄마야’라고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표현이 어머니에 대한 대체 불가 애착심(愛着心)의 다른 이름이라고 믿어왔다. 이보다 어머니를 향한 간절하고 호소력 짙은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인지 기능이 여물기 한참 전인 아주 어린 나이에도 우리가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찾는 습관은 그래서 습관이라기보다 천성(天性)이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유아(幼兒) 때 기억이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머물러 있는 것도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가끔 어머니 생각을 하면 서너 살 무렵의 그때 일이 아련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처음 방문한 외갓집
내가 여섯 살 때였다. 아직 공동체 생활의 빛과 그림자를 알 수 없었던 나는 1968년 무더운 여름날, 어머니 손을 잡고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에 있는 외갓집에 갔다. 내가 외갓집을 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외갓집은 개울을 건너고 논밭을 가로질러 집성촌(集姓村)을 이룬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경주 김 씨인 어머니는 4남매의 둘째로 이곳에서 나고 자라 20여 km 떨어진 계림동의 두 살 위 총각, 즉 아버지와 혼인했다.
한국전쟁 중일 때라 신혼의 단꿈을 맛보기도 전에 전쟁터로 간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어머니는 6개월 넘게 기별이 없어 말 못 할 속앓이를 하느라 일일(一日)이 여삼추(如三秋)였다고 그때 심경(心境)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손자를 처음 만난 외할아버지는 도포(道袍) 차림에 망건(網巾)을 쓰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는 신기함보다 무서움이 앞서 어머니 품에 꼭 안겨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여름에 웬 발목까지 오는 옷,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이지만 그때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낯선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기만 했다.
여섯 살 무렵, 어머니와 찍은 사진
어머니는 그런 나의 심정과는 아랑곳없이 내 손을 잡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큰절을 올리라고 자꾸 채근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서툴게 머리를 조아리는 시늉만 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뵙기는 할아버지와 다를 게 없지만, 머리를 쓰다듬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군것질거리를 주섬주섬 챙겨준 할머니는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어머니의 어머니인 외할머니를 그날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대구 집에서 한 번 더 뵀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상여꾼 흉내와 무서웠던 곡소리
외갓집 안방에는 낯선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 친척분들도 있었고, 동네 어른들도 있었다. 도회지에서 온 여섯 살 꼬마를 놀려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갑자기 한 어른이 내 앞에서 손짓, 발짓을 섞어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가면서……어이, 어이, 하고 구슬프게 소리 내 울자, 뒤따르던 유족들이 아이고, 아이고, 하며 슬픔에 목메어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는데…….
나는 이름 모를 동네 어른이 청승맞게 흉내 내는 곡소리 앞에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곡소리가 너무 무서웠던 나는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가 우는 나를 얼른 껴안고 다독이고, 외할머니는 공연히 쓸데없이 외손자를 울린다며 어른에게 핀잔을 줄 때까지도 나는 계속 울었다. 지금은 상가(喪家)에서도 듣기 힘든 곡소리를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경험했다. 그때 그 곡소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외갓집
그때 외갓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자, 할머니가 이상하게 생긴 쇠로 만든 종지 모양의 그릇 속 심지에 성냥불을 붙이자 방 안이 환해졌다. 나중에 정체를 알게 된 호롱불을 할머니는 안방에도, 대청마루에도, 건넌방에도 밝혔다.
캄캄한 밤이 되자 안방에서 내다본 마당은 더 캄캄했다. 호롱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인 두 분만 기거하는 농촌 안방에 어린아이 장난감이 있을 리도 없고, 동무가 될 또래도 있을 리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어머니 곁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도,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하면서 지루하고 답답하다는 무언의 항변을 할 뿐이었다.
#외할머니가 꺼내 놓은 소쿠리
그런 내가 안쓰러웠던지, 외할머니는 안방 시렁 위에 얹힌 소쿠리를 꺼내와 내 발 앞에 슬며시 밀어 놓았다. 소쿠리 안에는 방금 볶은 것 같은 까만 콩과 삶은 감자, 옥수수, 튀밥이 들어있었다. 삶은 감자와 옥수수, 튀밥의 맛을 알고 있던 나는 잠시나마 먹는 일로 무료함을 달랬다. 반찬으로만 먹는 줄 알았던 까만 콩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짧은 농촌의 밤과 으스스한 뒷간
호롱불에 의지한 농촌의 밤은 도시보다 짧았다. 외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취침 전 인사를 드리고, 건넌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우려는데 오줌이 마려웠다. 마당으로 내려가기 전, 할머니가 휴대용 호롱불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시골 농가(農家)의 재래식 화장실, 뒷간은 으스스했다. 어른 키 높이에서 보면 안이 다 보일 정도로 뒷간의 문은 낮았다. 나무에 거적을 덧댄 뒷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서서 쏴 자세를 취하려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딤판이 영 생소해 발사(發射)에 애를 먹었다. 간신히 일을 끝내고 자리에 누웠는데, 뒷간의 생경한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려 어머니나 나나, 잠들기까지 꽤 애를 태웠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를 떠올리면 기억의 맨 앞자리로 소환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