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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기와집에서 여름 나기 ①등목의 추억

by 박인권

기와집에서 여름 나기 ①등목의 추억


#이상기후, 기상이변

2023년 8월 8일, 지구가 열 받았다. 혹독한 여름이다. 연일 폭염(暴炎)이 계속되고 있다. 땅과 바다, 하늘 모두 엄청난 열기를 뿜어대고 있다. 지구 온난화의 여파(餘波)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탄소배출, 온실가스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 넘게 쏟아낸 탄소배출의 업보(業報)다. 지구가 온전하면 이상하다.


이상기후도, 기상이변도, 따지고 보면 다 인간들에게 귀책(歸責) 사유가 있다. 인간들이 창조하고 발명한 문명의 이기(利器)와 난개발(亂開發), 그 뒤꼍에서 오래 참고 웅크리고 있던 어두운 그림자들이 온갖 신음(呻吟)을 지르며 지구 곳곳을 강타하고 있다.


자연보호와 지구 생태계 보전(保全)의 심각성을 알리는 위험신호다. 자연은 할리우드 액션을 모른다. 위험신호는 인간들의 활동, 산업 활동에 대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탄소배출의 심각성을 알지만, 처방의 현실화가 어려운 이유다.


#대구의 여름과 신일 선풍기

기와집 시절, 대구의 여름도 뜨거웠다. 70년대 고향 집의 냉방 기구는 선풍기와 부채였다. 그 시절, 에어컨이 있는 집은 드물었다. 우리 집 방마다 신일 선풍기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대청마루에도 키 큰 선풍기 한 대가 있었다. 대청마루에서 식사할 때면, 안방 선풍기를 가져와 두 대의 선풍기를 틀었다.


신일 선풍기는 우리나라 선풍기 역사의 산증인이다. 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선풍기로 등장한 신일 선풍기는 1967년 양산(量産) 체제에 성공하며 업계 선두로 올라선 뒤 지금도 국내 선풍기 시장 부동의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선풍기, 하면 신일, 신일, 하면 선풍기였던 등식은 50년 전 내 기억에도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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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거실에 있는 선풍기. 날개가 7개인데 옛날 고향 집 선풍기는 날개가 3개였다.


#선풍기의 존재감

초등학교 때 우리 집 선풍기의 바람 세기 조절 버튼은 지금처럼 원형이 아닌, 길쭉한 직사각형이었다. 3개의 버튼 아래에는 바람의 강약을 1단, 2단, 3단으로 표시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회전 장치는 선풍기 모터 덮개 위 중앙에 누르고 당기면 똑딱 소리가 나는 손잡이 스타일로 장착돼 있었다. 그때도 시간 조절 기능인 타이머가 부착돼 있었는데, 지금과는 다르게 한 시간 단위로 선택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에어컨이 일반화된 냉방 기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된 요즘에도 우리 집에는 에어컨과 별도로 여전히 신일 선풍기가 방마다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에어컨 시대임에도 선풍기의 생명력이 건재한 것을 보면, 선풍기는 냉방 가전제품의 가치를 뛰어넘는 생활밀착형 필수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약식 웃통 샤워, 등목의 방법

선풍기가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그늘막 역할을 했던 그 시절, 찬물로 샤워할 때보다 더 시원한 목욕 방법이 있었다. 이름하여 등목(沐), 또는 등물로 글자 그대로 등만 목욕하는 옛날식 약식 샤워다. 가정에 목욕 시설이 없던 때, 등목은 한여름 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인기 아이템이었다. 등목은 준비 자세부터 끝날 때까지 전 과정이 흥미롭다.


- 웃통을 벗고 엎드려뻗쳐와 똑같이 팔다리를 쭉 뻗고 마당 수돗가 바닥에 엎드린다.

- 찬물 세례를 받기 전, 아주 짧은 1, 2초 동안 엎드린 사람은 기대와 설렘으로 바짝 긴장한다. 긴장하는 이유는 등줄기를 타고 벼락같이 온몸으로 전해올 찬물의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청량감 때문이다. 찬물이 등줄기에 닿을 때의 차가운 느낌은 등줄기에 닿기 전의 기대치를 항상 웃돌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이 순간이 등목의 하이라이트다.


- 가족 중 누군가가 바가지로 찬물을 허리춤에서부터 등과 목덜미까지 끼얹는다. 바가지 대신 수도꼭지에 연결한 고무호스로 물을 끼얹기도 한다.

- 찬물을 두, 세 번 혹은 서너 번 끼얹고 비누칠을 한 다음 다시 찬물로 몸을 씻어낸다.

-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2. 20231006_103926.jpg

접이식 한지 부채의 품격. 벌과 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등목의 묘미(妙味)

등목의 맛은 해 본 사람만이 안다. 등목을 안 해 본 사람도 없고, 등목을 한 번만 한 사람도 없다. 요즘처럼 푹푹 찌는 여름날, 밖에 나갔다가 집에 오자마자 등목을 마치고 나면, 시원한 느낌이 급발진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찬물이 허리춤에서부터 등을 타고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점령하는데, 그 기분이 마치 냉동창고 문을 열었을 때 훅, 하고 오싹한 냉기가 얼굴을 덮치는 것과 같다. 매번 반복할 때마다 찬물 세례의 성취감이 기대치를 뛰어넘는다는 점, 이 점이야말로 등목의 매력이자 등목의 준비 자세에서 만끽하는 짜릿함의 이유다.


나는 고무호스보다 바가지로 한꺼번에 물을 끼얹는 방식을 좋아했다. 고무호스에서 나오는 물은 등에 닿는 물살의 세기가 약하고 접촉 범위가 바가지 물보다 좁아 순간적으로 폭발하듯이 느껴지는 찬물의 청량감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3. 20231005_211351.jpg

옛날식 손부채는 지금도 있다. 옛날 부채보다 손잡이도 튼튼하고 대나무 살도 훨씬 더 촘촘하게 엮여 있다.


#등목의 지혜

윗몸에만 찬물을 퍼부어 더위를 다스리는 등목은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다. 우리 몸은 하체보다 상체가 열이 더 많다. 열이 많으면 땀도 많이 흘리게 돼 더위에 더 취약하다. 여름에 하체보다 상체가 더 덥고, 겨울에는 반대로 상체가 추위에 취약하다. 추운 날, 열 발생은 체온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어릴 때 등목은 형들과 번갈아 품앗이로 하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나설 때가 많았고, 어머니의 손길이 등에 닿을 때 등목의 만족감도 높았다.


#세숫대야에서 숨 참기

등목과 함께 더위를 이기는 방법이 또 하나 있었다. 세숫대야에 찬물을 가득 붓고 그 속에 얼굴을 푹 담근 뒤 하나, 둘, 셋… 숫자를 열까지 센 다음에 고개를 드는 식이었다. 형들과 누가 더 숨을 오래 참는지 겨루는 일종의 놀이였는데, 숨 참기를 즐기면서 더위를 물러가게 하는 재미난 게임이었다. 등목보다 더위를 날리는 쾌감은 적었지만, 나름 시원한 맛이 있었다.

샤워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어릴 때 등목의 추억은 여전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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